◇ 시인과 시(현대)

이미화 시인(삼천포) / 허氏의 구둣방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7. 05:00

이미화 시인(삼천포) / 허氏의 구둣방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은

가난한 마을의 착한 지붕을 건너가면서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부터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이동전화기 판매점에 다니는 착한 처녀의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던 허氏의 남루한 저녁에

잠깐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에 맞춘 그의 굽은 등 뒤로

따각 따각 처녀의 발걸음이 이동전화기 전화 연결음으로 터진다

중심을 놓고 뒷굽을 맞춘 구두가 흔들린다

일용할 하루의 노동이 땀 내음 밴 구둣방을 넘보기도 하지만

늘 기우뚱 한쪽으로만 기우는 그의 세상에서

수선 중인 구두는

기운 없는 그의 한 쪽 무릎에서 완성되는 절망이 키운 꿈이다

다시 언제 그의 세상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구두 뒤축이나

밑창만으로 키워 놓은

환한 세상이 그에게선 자라고 있다

하나 둘 찾아와 박힌 별들의 뒷자리로 들던 그가

창문에 걸린 어둠을 후다닥 걷어내고

달빛 속에서 주춤거린다

볼이 넓고 우직한 신발 속 그의 한쪽 발이

나머지 발의 오늘을 타전한다

 

- 경남신문 2010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미화 시인(삼천포) / 중개보조원

 

 

커다란 장부 옆구리에 끼고

알이 밴 다리 짚으며 계단 오르는

그녀는 중개보조원

굽 낮은 신발만 있다는

그녀는 주공아파트 상가에서

집을 소개하는 수수꽃다리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을 소개할 때에는

손님보다 앞장서서

단숨에 올라야 해요

허리와 무릎은 한층 한층 리듬을 맞추죠

한 번 더 보여 달라는 요청이 오면

마음도 몸도 벌써 리듬을 타고 올라가요

도시는 참 수직적이죠 그녀도 꿈은 수직이에요

아무도 없는 곳에선

난간 잡고 힘껏 허리 펴 봐요

휴대폰 전화벨이 울려요

이사하기 좋은 날은 자주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물건 장부 내려놓고 단화 끈 질끈 동여매는

그녀는 중개보조원

늦은 저녁을 들어요

수수꽃다리 향기가 코끝을 스쳐요

세상의 집을 소개하는 일은 참 고달프고 행복한 일이에요

 

 


 

이미화 시인(삼천포)

1964년 경남 삼천포 출생, 마산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방송통신 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콘텐츠학과 석사 졸업,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재 진주에서 부동산공인 중개사로 활동, 시집 『치통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