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승자 시인 / 레몬나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14. 05:00

박승자 시인 / 레몬나무

 

 

 레몬나무를 심고 싶었어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금종처럼 노랗게 익은 레몬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

 상상만으로 즐겁지 않나 .

 

 가끔 선머슴 같은 바람이 지나가면 노오란 신향기가 어린별의 숨결처럼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 울음을 터뜨리는 창문으로 멀리 퍼져나가는.

 

 그래서 마음 밭 두 평쯤을 갈아엎었지.

 하지만 결심은 자꾸 마뤄지는 법. 어디서 묘목을 구해야 하나 궁리하다 두어 해쯤이 지났어. 지금도 어디서 묘목을 사야하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도무지 난감한 날, 다시 레몬트리 상상을 하는 거야.

 

 그 신향기가 퍼져 나가면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윙크를 하는 상상, 노란 웃음이 너울처럼 퍼져가겠지. 상상도 즐겁게 키가 크는 법. 별빛도 찾지 않는 밤, 각을 세운 바람이 낡은 문풍지를 사납게 두드리는 밤. 또 다리 레몬트리 상상을 하는 거야.

 

 아, 그 신향기 금종처럼 열리는,

 탄일 종소리처럼 멀리 퍼지고, 따뜻하고 상큼한 노란색의 눈물이 주렁 주렁 달려있는,

 꼭 먼길을 물어 물어서라도 레몬나무,

 상상을 심는 거야.

 

계간 《미네르바》2012, 겨울호

 

 


 

 

박승자 시인 / 잠시

 

 

 저녁을 짜게 먹었다 싶어 슬리퍼 끌고 슈퍼 가는 길

 환하게 불 밝힌 슈퍼 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주인 백

 팻말이 손잡이에 걸려 있다

 

 잠시라는 문구에 등 돌리지 못하고 발자국으로 보도블록 위에 꽃판을 만들고 있는데 잠시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를 많이도 버려 둔 것만 같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시절에 저 팻말을 잠시 빌려 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시린 발끝으로 꼭, 꼭, 꽃판을 수 겹으로 만들어도 주인은 오지 않고 잠시만으로 턱없이 부족한,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발걸음을 한없이 머물게 하고

 

 고개를 드니 슈퍼 안이 환했다가 어두워지는 것을 다 지켜봤을 회화나무, 쉬지 않고 물을 퍼 날랐을 물관도 어느 나무 속의 아늑한 습기를 잠시라도 방문하고 싶었을 터

 

 야윈 가지 사이 별들이 환한 밤

 마음도 잠시 마실 갔다 온 것처럼 말개져 있었다

 

 


 

박승자 시인

1958년 전남 보성 출생. 200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0년 <시안> 등단. '살아 있는 시' 동인. 시집 『곡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