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향기 시인 / 비상구를 마시는 남자

파스칼바이런 2023. 4. 14. 05:00

윤향기 시인 / 비상구를 마시는 남자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압생트가 다가와 초록빛 신비주의를 따라 준다. 해바라기의 노란 웃음을 찍어 36장의 자화상을 그린 남자. 면죄부 찍어 대는 성직자를 쫙쫙 찢어 버린 남자. 런던 하숙집 딸에게 퇴출당한 남자. 사촌에게 청혼했다 뻥 차인 남자. 미모의 미망인에게 훅 차인 남자. 남동생과 7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나흘 동안 쓰디쓴 커피만 23잔을 마신 남자. 강물 소리 무성한 창녀를 사랑해서 아버지와 척진 남자. 뚱뚱한 화상들을 패스포트 도둑이라고 요약한 남자. 폴 고갱과 난타 치다 자신의 귀를 자른 남자. 정신병원에 자신의 발로 뎅강뎅강 들어간 남자. 계절을 유폐시키고 있는 동안 새 울음의 안감도 찾아오지 않은 남자. 신들린 듯 자신을 마셔 버린 남자. 2,000여 점의 작품 중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한 남자. 심장을 돌아 나온 무표정에 권총을 겨눈 남자. 37년간 수집한 별빛은 너무 자라서 이제는 안지도 못하는 남자를 만난다.

 

 비 내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혁명처럼 오르내렸을 그의 구두를 흘깃 내려다본다. 폭우를 뚫고 오베르 밀밭에 비밀 요원처럼 숨어들던 까마귀의 뒤축을 흘깃 내려다본다. 물감 살 걱정은 사이프러스의 주린 배를 지나 구겨진 바짓단을 적시며 낡은 구두코에 쇠구슬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다.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천년의시작, 2021)

 

 


 

윤향기 시인

1953년 충남 예산 출생.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91년 《문학예술》로 등단. 경기대학교 한국동양어문학부 교수, 시인, 여행작가. 시집 『북극 여행자』 『피어라, 플라멩고!』 『흙, 바람을 채집하다』 『엄나무 명상법』 『굴참나무 숲과 딱따구리』 『내 영혼 속에 네가 지은 집』 『그리움을 끌고 가는 수레』와 수필집 『태도가 뮤지컬이 될 때』 『아모르파티』 『나는 타인이다』 등. 2006년 제4회 서정시학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열린시학』 고문, 『문학에스프리』 편집인. 웹진 『시인광장』 객원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