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기 시인 / 비상구를 마시는 남자
윤향기 시인 / 비상구를 마시는 남자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압생트가 다가와 초록빛 신비주의를 따라 준다. 해바라기의 노란 웃음을 찍어 36장의 자화상을 그린 남자. 면죄부 찍어 대는 성직자를 쫙쫙 찢어 버린 남자. 런던 하숙집 딸에게 퇴출당한 남자. 사촌에게 청혼했다 뻥 차인 남자. 미모의 미망인에게 훅 차인 남자. 남동생과 7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나흘 동안 쓰디쓴 커피만 23잔을 마신 남자. 강물 소리 무성한 창녀를 사랑해서 아버지와 척진 남자. 뚱뚱한 화상들을 패스포트 도둑이라고 요약한 남자. 폴 고갱과 난타 치다 자신의 귀를 자른 남자. 정신병원에 자신의 발로 뎅강뎅강 들어간 남자. 계절을 유폐시키고 있는 동안 새 울음의 안감도 찾아오지 않은 남자. 신들린 듯 자신을 마셔 버린 남자. 2,000여 점의 작품 중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한 남자. 심장을 돌아 나온 무표정에 권총을 겨눈 남자. 37년간 수집한 별빛은 너무 자라서 이제는 안지도 못하는 남자를 만난다.
비 내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혁명처럼 오르내렸을 그의 구두를 흘깃 내려다본다. 폭우를 뚫고 오베르 밀밭에 비밀 요원처럼 숨어들던 까마귀의 뒤축을 흘깃 내려다본다. 물감 살 걱정은 사이프러스의 주린 배를 지나 구겨진 바짓단을 적시며 낡은 구두코에 쇠구슬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다.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천년의시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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