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혜정 시인 / 당신을 꺼내 읽다

파스칼바이런 2023. 4. 16. 05:00

오혜정 시인 / 당신을 꺼내 읽다

 

 

《노자의 벌레》*를 펴면

노자의 창이,서오릉이 열린다

햇살이 한 장,바람이 한 장……

간다,넘어간다

푸른 잎들이 우거진 책장 사이로 걸어가는 아버지

 

당신을 꺼내 읽는다

행간마다 표지(標紙)를 남기고 가는 벌레

촘촘한 글자 사이마다

손에 묻어나는 당신을 향한 기호들……

 

지난 가을 페이지에서

두 개의 발자국을 꺼낸다

당신의 말들에 볼을 비빌 때마다

못다 했던 말들이 얼룩처럼 묻어났다

돌아보는 길목마다

‘무수한 부호들이 날아서 꿈틀거린다’

 

당신의 날개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이 책장을 덮는다

한여름 밤에

아버지의 기억을 책갈피로 꽂아둔다

 

눈이 시리다

 

*《노자의 벌레》:고(故)오남구 시인의 시전집

 

 


 

오혜정 시인

2005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한양대학교 박사 과정 졸업(문학박사). 현재 계간 『시향』 편집장.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