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육근상 시인 / 가을비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19. 05:00

육근상 시인 / 가을비

 

 

너무 어릴 적 배운 가난이라서

지금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제는 더 늙을 것도 없이

뼈만 남은 빈털뱅이 아버지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드셨는지

붉게 물든 옷자락 흩날리며

내 옆자리 슬그머니 오시어

두 손 그러쥐고 우십니다

산등성이 내려온 풀여치로 우십니다

 

 


 

 

육근상 시인 / 달 강

 

 

행상 나간 엄니는 오밤중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나는 양칭이 길 처녀 귀신만 산다는 달 강 건넜네

 

무청밭 지나가는 짐승이 어린애 울음소리로 자지러지면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가지가 목덜미 싸늘하게 핥고 갔네

 

고개 넘느라 이슬이 다 된 엄니 따라 걷는 달 강 길에는

망초꽃으로 쏟아져내린 별들이 기우뚱기우뚱 발등에 차이기도 했네.

 

-시집 <여우> 중에서

 

 


 

 

육근상 시인 / 만개(滿開)

 

 

꽃놀이 갔던 아내가

한 아름 꽃바구니 들고

흐드러집니다

 

선생님한테 시집간

선숙이 년이

우리 애들은 안 입는 옷이라고

송이송이 싸준 원피스며 도꾸리

방 안 가득 펼쳐놓았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없이

온종일 살구꽂으로 흩날린

곤한 잠 깨워

하나하나 입혀보면서

 

아이 예뻐라

아이 예뻐라

 

 


 

육근상(陸根箱) 시인

1960년 대전에서 출생. 1991년 《삶의 문학》에 〈천개동〉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절창》 《만개》 《우술필담》 등이 있음. 2016년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수혜. 제12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현재 대전과학기술대학교 임상병리학교실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