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소영 시인 / 저무는 들녘에 서서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20. 05:00

송소영 시인 / 저무는 들녘에 서서

 

 

'헷세'를 좋아하세요?

곰나루에서 그렇게 만났다

학군단 생도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튕기던 정열이 날 바라보며 수줍게 숨는다

가난 속에 감춘

빨간 T셔츠 몸체와 낡은 감색 반팔 소매

그는 팔을 들어 오른 손 집게손가락으로

열없게 턱밑을 가로 그었다

 

빛나던 20대의 그 사내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세월만 잔뜩 걸머멘 初老의 사내가

추수가 끝난 들녘에 고독하게 서있다

구부정해진 어깨를 노을에 감추고 흙투성이 장화를 벗어

조심스레 마로니에 밑둥치에 놓는다

 

저무는 들녘에 서서

빛나던 光輝사라진 다소곳한 붉은 해를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은 누구의 것인가

 

 


 

 

송소영 시인 / 나는 네 반쪽 얼굴을 여는 열쇠이고 싶다

 

 

바깥세상은 집콕 이후로는

비밀의 화원이다 열쇠를 가진 자만이

그 야생의 향기를 열고 맡을 수 있다

 

내 손을 떨리게 하던 너의 갸름한 턱선도

자물쇠가 열려야

따스한 기운을 내뿜던 콧방울 속에 감춰진 두 구멍도

벌어졌다 오므라지곤 하던 붉은 입술도

 

이제는 비밀의 화원이다

 

볼을 간지럽히던

너의 평화로운 숨결은 어디에 있는가

예고도 없이 툭 튀어나와 내 볼에 와 닿던

재채기 속의 네 비말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네 반쪽 얼굴을 여는 열쇠이고 싶다

 

 


 

송소영 시인

1955년 대전에서 출생. 공주교대 국어교육학과을 졸업, 율현초등 30년 교직 생활. 2009년 《문학·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의 존재』가 있음. 수원문학 젊은작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현재 수원문학 편집장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