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혜미 시인 / 하필이면 여름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27. 05:00

이혜미 시인 / 하필이면 여름

 

 

 뭘 겁내 못 되돌려 그냥 지금 바라봐 여름이 장전한 눈빛을 알잖아 이제 와서 헤아리는 심정 생각보다 깊이 묻혔던 자기야, 부를 수 없이 저기요 별것도 별것도 아닌 일에 뒤돌아보는 고개를 봐 언제까지 저 뜨거운 뿌리의 자장을 외면하겠니 우리 아직 본 적 없지만 기꺼이 너그러이 마음을 내어줄게 자기야 작약이 세계를 찢으며 터져 나오는 시간이야 하나의 장면이 태어나고 마는 기쁨으로 그러니 스스로의 무게에 놀라 고개를 떨구더라도 아름답기를 포기하지 말자 여름 낮잠처럼 자장자장 다독이며 사라지려는 잠을 애써 덧대며 꿈꾸던 것을 마저 이으며 마음을 멈추지 말자 꼭 쥔 주먹을 조금씩 펼쳐내는 힘으로 휘몰아치는 작약에게 속삭이지 네가 나였으면 좋겠어 저기에서 자기까지 단숨에 피어나도록 스스로의 숙근을 자전하며 애태우며 서로의 문간을 서성이며 안녕 안녕 궤도를 맴돌다 서투른 허밍을 흥얼거리며 별의 별 것이라고, 다시없을 우주라고 속삭이며 토닥이며 자장자장 자기야, 잠드는 작약이야

 

-시집 『흉터 쿠키』(현대문학, 2022) 수록

 

 


 

 

이혜미 시인 / 꽃에 묶인 왼손이 아니었다면

 

 

왜 꽃다발 속 꽃들은 서먹해 보일까

 

한 손에 꽃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걸었어

최소한의 날카로움으로

심장의 안팎을 알기 위해

 

소중하다 말하면

다가와 아름다운 자리가 될 줄 알았지

 

생일 초의 은박지

잘못 다린 옷의 반짝임

꿰맨 자리의

미지근한 흰빛이 되어

 

스미고 싶었지 비루하지만 확실한

흉의 임자로

 

돌아서는 순간 돌변하는 사람처럼

전화를 끊으며 차가워지는 표정처럼

낯빛부터 시드는 것들이 있어서

 

꽃을 든 손은 무용한 손 무력한 손

 

떠나간 깃털들 헛되이

손바닥에서 부스러지고

젖은 발끝이 흐릿해질 때

 

저물어갈 것을 몰랐지 썩은 뿌리에 마른 꽃잎을 달고

내치지도 못할 마음이 될 줄은

 

풀려가는 리본을 고쳐 매면

견고해지는 옥죄임의 둘레

 

-계간 『아토포스』 2023년 봄호 발표

 

 


 

이혜미(李慧美) 시인

198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 『빛의 자격을 얻어』가 있음.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 제15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 수상. 제10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