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기원 시인 / 들판에서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29. 05:00

송기원 시인 / 들판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대의 소식을

가을 들판에서 비로소 들었습니다.

멀리 벌판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단내를 풍기며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벌판 가득히 오지게 잘 여문 이삭들과

그 이삭을 거머쥔 농부의 구릿빛 팔뚝이

또 그대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저무는 가을 햇빛, 군데군데 비어 있는 논밭,

여기저기 자랑스럽게 피어 있는 가을꽃들도

빛나는 몸짓으로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십 년을 넘어, 헛된 땅으로 헛되이 찾아 헤매다

이제는 빈 쭉정이가 되어 가을 벌판에 나자빠져버린

나를 안쓰러워하며, 어루달래며

오늘 비로소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둘러보는 벌판 가득히 온통 그대뿐인데

어째서 나는 그토록 눈멀 수 있었을까요.

돌아오는 길에는 우연이듯 싱싱한 별도 몇 개 돋아서

다시 한번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송기원 시인 / 이미자 노래나

 

미국놈들도 도둑놈이고

우리도 도둑년이에요.

쑥고개 기지촌에 몸 담은 지 삼 년

국제결혼에 홀려 정 몇 번 주고

아이 한 번 떼고, 성병 두어 번

흰둥이 검둥이 두루 거친 다음에

오늘은 김치냄새 나는 당신이 손님이에요.

전라도 땅끝 흙부뚜막에

된장 뚝배기 끓던 고향집을

나라고 차마 잊을 수야 있나요.

자, 우리 나가요,

빠다냄새 나는 돈으로 한잔 살 테니.

어디 해장집 가서 소주병 까면서

이미자 노래나 오지게 불러요.

 

 


 

 

송기원 시인 / 붉은 꽃잎

 

 여주에 가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스님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스님의 우란분재에 저는 어머님의 천도를 맡겼습니다.

 스님의 염불에 따라 어머님의 신위가 연기로 사라질 때, 그 연기에 취해 배롱 나무 붉은 꽃잎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사랑이여, 저의 마음속 붉은 꽃잎은 언제 어디서 무슨 연기에 취해 떨렸을까요.

*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서 음력 7월 15일에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 우란분(盂蘭盆)은 '심한 고통'이란 뜻을 가진 범어 '울람바나(ullambana)'의 음을 취해 만든 한자어임(옮긴 사람).

 

 


 

송기원(宋基元) 시인

1947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복기의 노래〉와 같은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경외성서(經外聖書)>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마음속 붉은 꽃잎』 등이 있음. 1983 제2회 신동엽 문학상. 1993 제24회 동인문학상. 2001 제9회 오영수문학상. 2003 제6회 김동리문학상. 2003 제11회 대산문학상.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