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용 시인 / 아기들의 만찬 외 6편
한경용 시인 / 아기들의 만찬
맞벌이 부모 대신 먼저 끓여 먹곤
한잠 푹 빠진 새끼들의 꼬부라진 잠자리
꼬까 장난감처럼 씻어놓은 냄비에는
꼬인 면발이 통통
-시집 〈빈센트를 위한 만찬〉, 한국문연
한경용 시인 / 세련과 난감 사이 겨울나무 사이로
오늘도 영등포역 버스 정류소에서 심야 버스를 기다린다. 자정이 되도록 세상과 싸우는 나를 태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며 다가올 것이다. 버스가 먼저 숨이 막혀 떠나고 취객들에게 삶을 호소하는 여인들은 나뭇잎으로 떨어져 나갔다. 택시들이 집으로 가자고 대신 호객하고 불빛을 받는 여자들도 나를 불러 세웠다. 중년의 주름을 감추지도 않고 나온 세련과 난감 사이 너무도 평범한 여인들에게 지극히 할 수 없는 이야기 어쩌다를 여쭈어본다. “남편이 다치갖고 종일 옆에 있어야 해예, 나올 시간은 이 시간밖에 없어예.” 내일 아침 새를 날리기 위하여 저 나무가 서 있는데, 이 밤은 좁히지 못하고 바람조차 불지 않는데 꼼짝도 않는 이 나무는 대체 어쩌란 말이냐, 서둘러 막차에 오르니 제 몸에 전깃줄을 칭칭 감아놓고 겨울밤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같이 달려가고 있다.
한경용 시인 / 달빛 조각
노인도매상가라는 병원에 계신 어머니의 종합고독세트를 디스플레이 하면 참외를 깎아 먹던 어릴 때의 냄새가 있습니다. 건반 위에서 키운 향긋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4·3 구덩이에 숨었다가 눈꽃 속의 총알을 피해 살아나신 달빛 조각이 있습니다. 그 멜로디의 굴레에서 즉흥 모자를 쓰고 국제시장에서 비로도 장사를 하며 여덟 식구를 먹여 살리셨던 당신의 스무 살, 맹렬한 시장터에 연꽃 향기를 세일 하신 부처님이 타월로 지친 마음을 닦아 드리고 있습니다. 강렬한 묘사와 터치를 하며 제주도의 산과 바다를 누볐던 바람은 당신의 악보 환상의 올레를 연주하는 페인트가 벗겨진 단층집 나일론 빨랫줄 위로 팔짱을 낀 햇빛이 어슬렁거리면 어머니의 뒷겨울에서 나오는 안개 바람으로 말려 올린 아이들 병실에 놓인 팬지가 설레던 하늘에 속살이 묻힐 시간, 눈먼 정원에 버무려질 봄을 입히는 밤 바지선을 예인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시고 계십니다.
한경용 시인 / 쉰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캄캄한 극장으로 들어갔다. “생일 축하합니다.” 삼십 년 다닌 회사의 액정 문자 관리인이 조기 퇴직을 알려 왔다. 곡예 비행하듯 살아온 날들이 만 볼트의 빗방울로 쏟아지자 나는 감기에 걸려 블라인드를 내렸다. 지난여름이 아픈 친구는 다시 몸조리를 하여 앞서 가고 이번 가을이 아픈 한 친구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멀미는 쌀가마니를 운반하다 진흙 위에 와르르 쏟아 버렸다. 흙덩이, 돌덩이까지 섞인 쌀을 주섬주섬 담다가 도미노 게임같이 기쁜 일이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퇴직하던 날부터 목을 죈 넥타이와 케시미어의 머플러가 소동을 일으키며 쉰을 스캔으로 떠서 들고 다녔다. 자재 적재장의 가시 철망인 내가 쌩쌩하게 잘도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하늘처럼 보였다. 삼백 원짜리 즉석 위안을 마시려다 버튼을 잘못 눌러 얼음을 먹었다. 검은 다이어리에서 깨어나 장거리 역전 슛을 날리는 독감 걸린 시 보헤미안의 들판을 달리는 바람과 내 안에서 코러스를 하는 잠시 쉰
한경용 시인 / 세한도
서귀인의 귀와 밀방아도 힘을 잃고 대정의 소나무가 불그스레 변해갈 즈음 반딧불 호롱불 삼아 오름이 달래고 바당과 말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눈에 어려진다 당신이 차린 밥상, 칭얼대는 새끼들 거친 붓 하나 물속의 마음도 추위를 벗하면 그릴 수 있겠다 먹물이 시리다 백지 위를 숨 쉬게 하라 바닷가 집 발치에서 활쏘기 하는 새 제주의 울음으로 휘 갈길 때만 어쩌면 섬 속의 섬, 혹한을 즐길 수 있으랴 매어둔 배들과 함께 묶여 있으니 고인 시간 속에 칼바람이 그려지네, 내 안의 내방객이 검은 바위가 될 쯤 한라여, 바다로 사르고만 있으련가 까마귀 우는 저녁, 제주목의 군졸들이 당도하겠다 나막신 신고 도롱이 차림, 마음을 정해야겠다 바람을 안은 귤중옥橘中屋,감귤창고 앞에서 아비 소나무를 세그루의 잣나무가 부른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한경용 시인 / 가시리加時里 加時里 불복의 명수 입도조는 새 시대를 더한다 加時里 내 마음이 밖에서 안으로 온 것이다 加時里 충신과 역적은 산새들의 왼발과 오른발 加時里 산새들의 중심부가 왕조의 중심부를 대체하다 加時里 동백나무 집터, 집 울 안, 정외왓, 중의왓, 서당 밭, 점당 터, 훈련 터, 사장射場 터 加時里 푸성한 전설이 죽대와 돌담에 걸리다 加時里 고석과 고목은 인忍의 상형문자 加時里 소백이 감당나무 아래에서 쉬고 가다 加時里 한라산의 이마가 마지막 과녁이다 加時里 망한 나라의 신臣은 이름까지 없어져야 한다 加時里 묘지를 높게 하지 마라 비석을 세우지 마라 加時里 각지에 흩어져 살아라 저서를 불태우라 加時里 광풍 속에 삐리꽃이 버들 못에 피었네 嘉時里 가시리 가시리 잇고 위증즐가 대평성대
-시집 『귤림의 꽃들은 누굴 위해 피었나』
한경용 시인 / 하얀 성(城)의 와불
요양원에서 우주를 보았다 편마비로 병든 아내 쪽 침상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 쪽 침상 남편은 고급 공무원이었는데 아내도 뒷바라지를 하다... , 오늘은 의사 아들이 면회 오고 딸은 유럽 여행 중이라고 자랑한다
아내는 한 걸음도 못 이동하고 남편은 누군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움도 기다림도 모르고 그러나 있다 안부를 묻고 있다 매일 매일 엘리베이터 소리 알고 있다 아무것도 없음을
다만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은하태양 만이 있음을 별과 별의 영혼 돌고 돈다 “우리의 태양이 한 바퀴 도는데 2 억 5천만만년 걸린다 은하달력을 보면 우리는 22 은하년을 살고 있다“
아비가 살아온 게, 양의 태양이라면 어미가 살아온 게, 음의 태양이라면 와불로 누워서 음이 양을 에너지 생명체. -계간 『시와 사람 』 2024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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