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미 시인 / 사막에서 외 15편
문현미 시인 / 사막에서
시간의 무덤인 거대한 사막을 바라보며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의 전언을 듣는다
유랑의 발자국들이 모래로 덮이고 피라미드 모래탑이 쌓였다가 사라지는 사이 수많은 나를 번제물로 바치게 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내일이 없는 길을 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벌판에서 누군가는 모래알 같은 나를 안고 돌아가고 누군가는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나를 만나리라
기둥 하나 없는 이방의 신전 너머 꿈꾸듯 청라 한 필이 주욱 펼쳐진다
아무 곳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사막의 열기가 아득하게 번지고 있다 바람의 뼈로 현을 켜는 광야의 시간이 돌아오고
문현미 시인 / 유목의 시간을 지나가다
사막의 봄은 모래 폭풍의 방울 소리로 찾아온다 혹독한 바람의 계절이 모래 사원의 문을 열고 숨쉬는 모든 것들은 숨죽이며 내일을 기다린다
바람이 마두금을 켜기 시작하고 말발굽 아래 마방의 유언 같은 선율 따라 모래가 윙윙거리고 바람의 칼날에 낙타가 울부짖는다
애써 모은 걸 모두 잃어버리는 분분히 허공에 흘림체로 사라지는 그게 바로 사막의 하루, 모래살이다
눈 깜박할 사이 바람의 회오리가 전신을 파고 들어 바람이 되는 길 없는 길이 끝없이 고비를 넘나들고
모래와 바람이 서로 부둥켜 안지 못하는 해와 달이 서로 심장을 마주하지 못하는 소유불가침의 모래 제단 앞에서
누구도 붙들지도 않고 붙들 수도 없는 유목의 시간을 까마득히 지나가고 있다
문현미 시인 / 그날
그저 서성거리며 마침표가 있는 그날을 꿈을 꿉니다, 차마 불멸이란 단어는 머무를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군화들이 구름 속으로 날아간 곳에 뜨겁게 설레는 영원이란 말, 디딜 틈이 없습니다
짐승 같은 울음이 뚝뚝 떨어지던 여기에 어둑발 한숨이 불꽃으로 타오르며 출렁입니다
눈 속에 깃든 어둠이, 입 속에 쌓인 어둠이 골수 깊숙이 고이는 어둠이 발목부터 머리까지 차오르고 있습니다
먼훗날 긴 밤을 깨치는 새벽의 불덩이처럼 그날이 환하게 솟아오르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생피를 찍어 황홀의 시를 쓰겠습니다
목마른 탄성 끝에 무릎 꿇는 임진강가에서 기적으로 찾아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비무장의 유산을, 완전한 소멸을 오랜 열병처럼 앓으며
부끄러운 느낌표가 묵념이 되는 저녁답 서서히 철조망을 덮는 노을길 따라 우두커니 나, 저물어 갑니다
문현미 시인 / 신유목민의 하루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손길이 무척 스마트하다 마침내 찾은 리틀포레스트에서 빠네와 리조토를 먹는다 찰지게 늘어지는 치즈가락을 말아 넣으며 이렇게 고소하고 쫀득한 생의 한 때가 있었을까 토마토 소스에 뒹군 밥알이 톡톡 씹히는 데 이렇게 걸죽하면서 착 감기는 맛깔스런 순간이 한 버니라도 있었을까 드립 커피를 찾아 맬버른 커피하우스로 걸음을 옮긴다 금빛 휘장을 두른 크리스탈 샹드리에의 여운이 커피향과 섞여 몽롱하기까지 하다 케냐 AA와 피낭시에의 환상적인 궁합에 흠뻑 취해 입속의 행복을 마시고 씹고 있다 창밖엔 북방에서 잘 자란다는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햇살의 눈부신 살점을 먹는 이파리마다 연초록 윤슬로 반짝거린다 김치와 된장, 고추장으로 비벼진 지난날들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린다 혀끝 찰나의 맛을 찾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내일의 맛 있는 노마드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 '신작특집'에서
문현미 시인 / 얼음 전선 -서대문형무소
한 몸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거기
나라를 지키려는 절절한 비무장의 지대와 민족혼을 뿌리째 뽑으려는 무장의 지대가 공존하는 거기
번뜩이는 칼과 칼집 속의 칼이 부딪히는 허공의 거기
총과 칼로 누르면 누를수록 더 단단해지는 더 날카롭게 벼리는
정복자들은 결코 알 수 없다
목숨 너머 불의 눈동자들, 천 년 별빛으로 흐르는 것을
소리 없는 울음이 켜켜이 쌓여가는 거기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영하의 최전선이다 -시집 『방울의 찬란』 (황금알, 2024) 수록
문현미 시인 /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사과를 먹으며 하는 게 좋을까 사과를 앞에 두고 하는 게 더 맛이 있을까 사과를 하려면 몇 개의 사과가 있어야할지 사과는 사과일 뿐, 그저 한 낱 사과일 뿐인데 땅 속 깊이 뿌리에서부터 물관을 타고 올라온 거친 근육의 힘으로 수줍은 듯 사과꽃이 피어나고 마음밭 귀퉁이에 또아리 튼 사과의 싹이 돋아나고 비바람과 햇살의 줄기찬 손길로 사과의 꿈이 여물어 마침내 고추잠자리 날갯짓으로 춤추는 가을이 익어간다 동그마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아삭-아사삭 하는 소리가 유쾌한 속도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새콤달콤한 과즙이 사과의 단단한 식물성을 잊게 한다 해빙의 시냇가를 돌아, 짙푸른 초록 울창한 시간을 너머 단풍의 때를 기다리며 붉게 견뎌온 사과들 한 마디 사과 대신, 한 입 사과의 싱싱, 상큼한 맛이 오래 묵혀둔 사과의 멋쩍게 머뭇거리던 시간을 눈깜박할 사이에 성큼 되돌려 놓는다 사과와 사과의 저 단단한 껍질들 사이에서 사과를 먹고, 씹고, 사과를 되새김질하고 사과는 사과보다 더 맛있는 걸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고 -시집 『방울의 찬란』 (황금알, 2024) 수록
문현미 시인 / 그래서 나는 -서대문형무소
저렇게 온몸에 갈망을 꽂고 나아간 적 있던가
까마득한 어둠의 바다 영혼을 고무질하며 피워 올린 소금꽃의 낮 그리고 밤의 시간들
벼랑 끝에 선 목마름으로
뜨거운 피 시퍼런 분노 멈출 수 없는 질주
단단하게, 위태롭게 날아오르는 간절한 바람의 회오리 높고 자욱하다
8호 감방, 고요한 태풍의 시간
문득 나의 숲에서 잠자는 새를 흔들어 깨워 목청껏 외치고 싶은
비폭력적 연두의 한때 -시집 『방울의 찬란』 (황금알, 2024) 수록
문현미 시인 / 봄소식
바닥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호수에 물닭 몇 마리 유유히 물길을 내고 있다
날개 밑이 슬그머니 부풀어 올라 물 낯바닥이 자꾸만 간지럽다
참 파릇한 봄날 아침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편지 한 통
문현미 시인 / 설악
깊은 계곡, 굽이굽이 은물결 소리로 천릿길 뒤척이는 백담의 밤
소소한 달그림자에 붙들린 눈망울 하나
눈잣나무들이 푸른 무현금을 켜는 홀로 그득한 밤
어둠이 둥지를 튼 능선에 쌓인 울울창창한 적막 아래
서리 내린 눈썹인 듯 달빛 한 줌
먼 그리움의 저쪽으로 사그락사그락
문현미 시인 / 바람의 독서
어떤 때는 빛 밝은 연두로 이어지는 새순의 길섶에서 오종종한 여린 낯바닥에 밑줄을 긋고 가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아침 이슬로 눈과 귀를 씻어내는 꽃봉오리들 앞에서 오랜 묵상을 하기도 하다가
연초록, 진초록의 나무와 나무들 사이 허공의 아스라한 침묵을 훑고 가기도 하다가
정말 어떤 때는 푸른 바다, 물파랑 흘림체로 써 내려간 경전을 순식간에 모조리 엎어 버리기도 하다가
때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넓디넓은 들녘의 서가에 공손히 이마를 땅에 대고 풀내음 향긋한 흙의 갈피를 넘기기도 한다
언제나 스스로 새 길을 만들고 낡은 길을 덮어버리며 사라진 왕국의 암호 같은 흔적, 낱낱이 받아쓰기도 하며
세상의 처음과 끝, 중심마저 마음껏 읽고 가는 천의무봉의 눈길, 손길……
문현미 시인 / 그런 때가 있다
분홍 알전구 오종종 켜진 나무 아래 바람의 찰나 속으로
나무 동네의 풍경으로 피어나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자라나고
대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더욱이 눈부신 공중에 수향樹香이 울창한 집
하냥 푸르른 노숙을 하며 살고 싶은 잎새 마음이 새록새록 돋는 때
어쩌면 나무가 내가 되고, 내가 나무가 되는
사무치는 순간이 반짝이는 그런 때
문현미 시인 / 몇 방울의 찬란
내 속의 마른 뼈들이 서걱거린다 바람 몰아칠 때나 세찬 비 가슴을 두드릴 때나 햇볕의 민낯이 눈부신 날이든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실금이 간 뼛조각들을 모아서 조심조심 날카로운 속도로 맞추어 본다
초록 그늘 울창한 나무로 서 있다가 침묵으로 말 건네는 바위로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흔들리며 떠 있는 조각배로 흐르다가 기억들의 창가에 아른거리는 빛의 잔영마저 간간이 마음 우물로 고여 드는 때, 두레박 줄 깊이 내려 물 한 자락 길어올린다
몇 모금 생수의 갈증으로 생기를 찾고 새로운 피를 받은 뼈들이 하늘을 향해 날개 펼치는 소리가 푸른 속도로 웅웅거리고 오랜 묵상과 눈물의 기도 너머 몸의 사원에서 빠져나온 언어들은 푸르게 돋아난다
최초의 노래인 듯, 낯선 고백 몇 방울
문현미 시인 / 소릿결
꽃이 피고 지는 소리를 심비에 새길 수 있다면
귀 쫑긋, 마음 쫑긋 온몸의 빗장을 다 풀어 놓아야겠다
은밀하게 반짝이는 아름답게 사운대는
무한 천공에 차오르는 소릿결
땅은 그저 묵묵히 기도하듯 받아 적고 있다
슬몃, 꽃 피어나는 소리를 이우는 꽃의 소리 없는 떨림을
문현미 시인 / 조금의 감정
조금 더 기다리면 아카시아 은방울 종소리 하얗게 울려 퍼지는 초록의 시간이 돌아올 텐데
저리 긴 행렬, 캄캄한 침묵으로 이어지고 있다 꽃단장 하나 없이 먼 길, 얼음발로 가고 있다
그믐달처럼 사위어가는 길일지라도 눈물을 말리는 착한 햇살이 따라올 것이고 아픔을 다독이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 텐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상에서 사라진 것들 해빙의 속도로 움틀 것이니
터지고 구멍 난 가슴마다 파릇한 숨소리 싣고 나비 떼 날아올 것이니
외딴 섬에서 달빛과 파도 소리로 견디는 아득히 그리운 사람에게
바다 내음 그득한 곰솔 숲에서 씻은 마음 알알이 새겨 넣어 해당화 소인을 찍어 부친다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봄의 중심에 있을 심장, 꽃눈들로 열리리니
문현미 시인 / 구름 노숙 ― 추전역
만약 새가 되어 날 수 있다면
눈과 귀를 씻고 새털구름의 친구가 되어 길고 긴 청강淸江에서 시나브로 흐르고 싶어
높푸른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 눈꽃 열차를 타고 흩날리며 갈 수 있는 곳
멀리 산 첩첩 능선 너머 불어오는 서리꽃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쉬엄쉬엄 오랜 누추를 활짝 말릴 수 있는 가끔 노루가 쪽잠을 자고 빗방울들이 스치듯 머무는
햇살과 별빛과 바람이 단골손님인 곳 내 안의 수많은 나, 눈부시게 소멸되는 곳
마음 한 자락 두둥실, 하루가 천 년인 듯 온갖 시름 사라지는 구름 여관에서
-시집 『몇 방울의 찬란』에서
문현미 시인 / 설산
저 울울창창한 결빙의 침묵을 보라, 끝없이 막막한 산등성이 너머 높게 치솟은 영하의 봉우리들
가파른 적막이 깃든 은백의 능선 따라 고요를 움켜쥔 새떼가 회색 멀미를 일으킨다
산은 까마득히 높고 물은 시리도록 맑은데 협곡 사이 몰아치는 긴장의 바람결
누구도 감히 닿을 수 없는 산정의 위태로운 절대 고독 아래
풋사랑의 몸짓도, 오랜 노역의 흔적도 분노의 칼날마저 하나의 점에서 말없이 반짝이는 곡선으로 이어질 뿐
저 단단하게 벼린 바위의 대열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사람 모두 허공이 그리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무욕의 눈부신 그물에 걸리는 찰나 전신을 관통하는 전율, 아스라이 깊다 -격월간 『시사사』 2019년 100호 기념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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