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연수 시인 / 히포캄프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6. 30. 11:31

최연수 시인 / 히포캄프*

 

 

그러니까 우리,

표정으로 통한다 믿어봐요

 

관계가 모호해도

예의 바르게 방긋

 

단 한 번 만나지 않았어도 저장한

얼굴과 얼굴

낯익다는 착각이 그럴듯하지 않나요

 

언제부터 다른 안색을 공전하는 걸까

홀로 자전할 거라는 생각은 언제쯤 꺾인 걸까

 

낡은 가계도를 열면

먼발치 지엄을 돌고 있는 배경

소리 없이 뒷문을 빠져나가는 그 눈치가 풀리지 않는 공식 같았지만

익숙한 나의 곁자리

뒤엎은 기분을 줍던 엄마였어요

 

그 그늘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나는

관심받지 못한 꼬마 행성

 

얼마나 보잘것없었으면

 

얼굴 점 같은 서러움을 빼버리면 말쑥한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알지도 못했을 텐데

손톱 물어뜯은 애꿎은 고민이죠

 

명목을 뒤집으면

사랑은 여전히 사랑으로 불릴까요

면목은 챙겨야지

가깝다는 우리, 데면데면 공전해 볼까요

 

잘 안다고 믿어볼까요

 

* 해왕성 XIV. 2013년 7월 1일 발견된 해왕성의 제14 위성.

 

 


 

 

최연수 시인 / 아득히 넘칠 내일이었을 거야

 

 

트렁크 속 기분이야

안감 비친 열매를 드나드는 수상한 바람

 

장거리를 떠돌다 왔을 그 바람, 기우뚱 봄날을 끌고 내려갔을 테지

 

멀미 나는 변방은 구역질을 토해내고 욱여넣은 불안 위로 불호령이 떨어졌겠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지 철없는 나이를 숨겨두고

계절이 넘어가도 갈매기 소인을 건네지 않았지

바람은

 

챙겨가지 못한 무릎은 망설임

꿈이 클수록 접어두어야 했을 거야

 

바람은 바람대로 천국을 불었을까

 

예민한 어제는 30노트로 날아가고 어느 새벽을 따라갔나 그 바람은

 

올라올 소식이 멀어 여전히 낯선 샛길

 

벽을 넘기 위해 까마득한 벽이어야 하듯 아득히 넘칠 내일이었을 거야 그때는

팔길게 자란 나무가 위태롭게 흔들리네

 

차라리 휘청이다 제자리로 돌아오길

고꾸라져도 다시 일어나길

그 바람

 

 


 

 

최연수 시인 / 붉은 망토

 

 

낯 뜨거운 여성 편력을 지나 드디어 투우 그림과 만나고,

와 와 관자놀이를 뛰게 하는 함성

나는 피카소를 스페인 투우장으로 밀어 넣는다

자신과의 싸움을 투우라 가정한다면

저 그림은 피카소가 치열하게 싸웠다는 증거

그 광기에 열광하는 나에게

붉게 펄럭이는 뮬레타*

무엇이 우리를 뜨겁게 했나

우리들의 열정은 얼마나 질긴 망토였나

오래전 그 남자, 붉은 티셔츠의 그 남자가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었지

숨을 뒷길이 없는 외길에서

남자의 붉은 눈길과 정육점 붉은빛을 뒤로한 채 내달렸지

붉은색은 진저리치도록 피하고 싶은 내 이십 대였지

계절 고갈된 지금은

무관심이 범람한 무채색의 시간

뮬레타는 낡을 대로 낡아서 그토록 혐오하던 붉은빛도 바래고

고가를 지불해도 찾을 수 없는 나의 뮬레타

가슴 뛰게 할 붉음은 어디 있나

모습을 보여줘

나의 붉은 망토

 

* Muleta. 투우에서 소를 자극할 때 쓰이는 붉은색 망토.

 

-월간 『모던포엠』 9월호 발표

 

 


 

 

최연수 시인 / 연말행사

 

 

 맨 앞이 보이지 않아도 박수. 당연히 박수. 넘겨받은 박수를 뒤로 전달하며 다시 박수. 따라서 박수. 무표정 뒤 무표정을 표정 뒤 표정이라 믿으면서 뒤통수에 박수. 동참하고 있다는 박수. 그래야 한다는 박수. 박차고 일어설 수 없는 박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박수. 박수마저 지루해 분위기를 바꾸는 박수. 앗, 저기 나른한 공기 뒤집는 비둘기처럼 환기하는 박수. 탈출한 비둘기에 용기 가상한 박수. 재빨리 누군가 잡았다는 신통한 박수. 그래? 정말? 와! 무턱대고 박수. 새장으로 들어간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문 뒤로 얌전히 사라질 우리. 그러므로 동정의 박수. 허리 숙여 빠져나가고 싶은 박수. 인내심에 열렬히 박수. 고쳐 앉는 박수. 꼬르륵 박수. 끝까지 박수.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최연수 시인 / 핵심 관계자

 

 

장미가 설레발을 칠 때부터 알아봤어

누군가 냄새나는 이를 보였네

 

그래도 말은 바로 해야지

비뚠 입을 숨긴 마스크가 중얼거렸네

 

날리거나 밟히거나, 증거는 새어 나오지

꼬리 긴 담장이 실금을 내보였네

양심처럼

 

자해는 자애에 가까워 무늬만 양심이야

태양이 시끄럽고

반성 없는 습관성이 눈치를 흘긋거렸네 조력인지 관망인지 울음이 돌아나갔네

 

야옹~~

 

방관자가 더 나빠 배후보다, 광장이 붉게 펄럭거렸던 먼 그때, 외면한 표정들을 똑똑히 기억해

 

목이 터져라 외친 장미

아이러니하게도 부추긴 담장

 

밤사이 폭우처럼 댓글 달고 사라진 익명들은 뒷골목이야

속내 숨긴 손가락만 빠르지

 

핵심을 흐리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 일단 피하고 보라는 관계와 정확히 짚으라는 관계는 달라

어둠보다, 그림자는

햇살에 더 선명하다는 걸 함부로 발설하지 않네

 

장미가 뛰어내렸대

 

누가 진짜 배후일 것 같니

 

 


 

 

최연수 시인 / 신사숙녀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의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차가운 머리입니다만

공손히 벗어 심장에 대는 것도 그 까닭입니다

 

파인 홈으로부터 멀어지는 유목민

운두 좁은 내일에 정착합니다

걸음이 없는 모자야

논리가 거기 앉아 있습니다

쓸쓸하고 무겁게

 

너이고 나인 다른 생각들

일기를 쓰듯이 썼다가

잠을 벗듯이 벗어버리는 혼돈입니다

 

먼저 내린 몸을 찾아

헐레벌떡 뛰어오는 우아한 모자

 

벌써 놔버리면 어떡해

다른 손에 잡힌 기억입니다

 

무례를 쓴 실내가 있고 훌쩍 날아간 민망한 날씨가 있습니다

 

죽어라 잊힐 것 같아

벗어버린 어제가 두렵습니까

 

선뜻 벗어두지 못한 것을 추억이라 부를 수 없어

무릅쓴 오늘이 더 두렵지 않습니까

 

시집 <안녕은 혼자일 때 녹는다>(2021)

 

 


 

최연수 시인

2015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2015년  《시산맥》 당선. 시집 『안녕은 혼자일 때 녹는다』. 평론집 『이 시인을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