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섭 시인 / 물의 발톱 외 5편
심은섭 시인 / 물의 발톱
달에서 지구의 플라스틱 병이 발견되었다 그 사실을 지구를 향해 황급히 터전했으나
인류가 벌집의 애벌레를 털어 먹었고, 피조개가 소유했던 갯벌을 갈아엎고 세운, 공장 굴뚝의 연기를 들이마신 나팔꽃 성대결절로 나팔을 불지 못해 새벽을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이다 산속 벌목공들의 톱질 소리에 숲들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산새들이 또 신문사에 제보했으나 입에 거품을 물고 쓴 기사 하나 없다
신문을 읽던 빗방울들이 치를 떨며 강가에 모여 완강한 쇠사슬의 스크랩을 짜고 황톳빛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발톱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 발톱으로 지상의 모든 길을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어떤 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웠다 종족 번식을 위해 여름밤과 협상하던 달맞이꽃의 생식기마저 알뜰하게 거세하고 말았다
온순한 물방울이 악어의 DNA를 얻으려고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시집 <물의 발톱>에서
심은섭 시인 /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고독사
방 안쪽에서도 문을 잠글 수 없는 닭장 같은 방에 늘 홀로 강물처럼 흘러가던 그가 해안으로 떠내려 온 나목처럼 누워있다
제 이름조차 쓰지 못하던 저 손가락, 햇볕 한번 쫴보지 못한 발바닥은 빙하의 계곡보다 군살이 더 두꺼워 보인다 갈비뼈는 용암이 흐르다 굳은 것처럼 주름져 있다 괘종시계가 다섯 번의 초혼을 부르는 오후 서늘한 광목천으로 덮인 그에게 낯선 쉬파리 몇 마리만 문상객으로 찾아왔다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두 손이 닳도록 비비며 극락왕생을 빌던 그들마저 돌아갔다. 땀에 늘 젖어있던 몸, 말려보지 못하고 떠난 사내 전세계약서에 도장 한 번 찍어보지 못했을, 그리고 지상에 제 발자국 하나 제대로 남겨보지 못한 채 목관 속에 몸을 눕혔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어둠을 풀어내던 하현달이 납빛 얼굴로 바라볼 뿐,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몸, 마지막 숨을 들이킬 때까지 혼밥하던 식탁 위의 숟가락, 유난히 차가워 보인다 비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온종일 내린다 공사장에서 흘리던 그의 땀줄기처럼 비가 내린다
심은섭 시인 / 능금의 조건 청동시계가 멈춰도 지상으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최상의 꿈을 출시하려면 민낯에 구릿빛 화살촉도 무수히 꽂아야 한다 그럴수록 너는 산모가 산통을 잊은 것처럼 홀로 꽃을 피워내던 통점을 잊은 채 또 낙화를 서둘러야 한다
어느 4월, 군중을 향해 낭독한 하얀 선언문대로 온몸의 모서리를 허물어야 한다 그때 돌칼이 아니라 풍상風霜으로 지워야 한다 그것은 제법 무게가 나가는 선조의 유전자가 허무의 원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늦가을, 흰서리를 맞고 겨우 둥근 영토를 얻어낸 늙은호박이나, 숯불에 영혼을 태워야 정품이 되는 삼겹살의 운명을 떠올리며, 전신에 붉은 화인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눈이 큰 짐승들의 검은 입속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은섭 시인 / 쉬파리
반 평 남짓 백반집 식탁에 앉아 점심 밥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몸무게가 1g도 채 안 되는 쉬파리 한 마리가 식탁에 내려앉는다 그는 두 눈을 굴리며 발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바짝 다가와 다짜고짜로 두 손이 닳도록 빈다 그때 “나는 여의도 황금뺏지도 아니고 홀로 핀 패랭이꽃일 뿐이고, 신용카드사용 대금을 틀어막으려고 월말마다 두통을 앓는 샐러리맨이고 비를 맞아 땅위에 납작 엎드린 폐허의 종이박스일 뿐···”이라고 중얼거리는 사이에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싹싹 빈다 흰 고봉밥을 허물며 또 생각했다 “노상방뇨 범칙금도, 교회의 헌금도 꼬박꼬박 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며칠 전 고스톱 판에서 광값을 떼먹은 것에 대한 팔뚝질이었다
심은섭 시인 /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이동의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칠 때마다 신은 나의 허파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정집 마당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까마귀가 스무 가지의 감각을 주고 갔지만 눈과 귀를 닫고 삽니다 오랜 시간은 이동의 습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죄로 직립의 자세로 저녁마다 굵고 긴 반성문을 씁니다 수은주의 붉은 혓바닥이 빙점 아래로 통과할 때 벌목공의 톱날에 온몸이 잘려 나가도 이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둣빛살점이 뜯겨나가도 피죽바람을 불러와 생손을 앓습니다 나는 어떤 계절에도 한 장의 잎만으로도 천공을 뚫고 부활을 합니다
심은섭 시인 / 퇴사역
사십 년 가까이 새벽마다 어둠 속으로 길을 내던 어떤 사내가 출근인식기에 마지막 지문을 찍고 사무실을 들어선다
책상 위의 만년과장 명패를 반납한 늦은 저녁, 늑골이 헐거워진 몸으로 퇴근길에 오른다
그가 전동열차 의자에 몸을 기대자 지난날들이 흑백무성영화처럼 스쳐갔다 병원비 미납으로 전세금이 압류 당하던 날, 인주밥보다 더 붉게 울던 일이며, 전깃줄보다 더 늘어진 공복으로 생이 경련을 일으키던 날들이며,
밤마다 외딴섬 물개울음소리를 들으며 살던 날들이며, 삶이 속도에 중독된 타이어처럼 조련되어 눈 밑의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던 날들이며, 험상한 IMF로 운명의 삽질이 중단되기도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겪어온 수난의 기억을 시나브로 말아 올리며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전동열차 안에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퇴사역, 퇴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양쪽입니다” 2023년 『시작』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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