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시인 / 예보 외 5편
문신 시인 / 예보 ㅡ권태
삼겹살집 입구에 벗어 놓은 신발들처럼 내일의 점괘 만큼를 내다볼 줄 아는 저녁이 왔다 가지런하게 선 구두와 그 옆에 넘어진 하이힐 한 짝이 소나기를 기대하게 한다 어쩌면 누군가 홱 뒤집어 놓은 슬리퍼 때문에 황사가 닥칠지도 모른다 고기를 굽는 사람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기껏 지나 온 날들을 난도질할 뿐, ‘해괴한 날씨의 이별과 아무도 만진 적 없는 사월의 눈동자'에 관한 연구보고서의 표절은 모른 척한다 또 있다 흰 운동화를 열두 번 짓밟은 후 눈을 세 번 감았다 뜨면 신발 주인의 행운을 훔칠 수 있다는 괴담도 모른 척한다 그들이 옳았다 신발들은 자기들이 어떤 불운을 이끌고 왔는지 관심 없다 한걸음 한걸음 뒤축 무너진 점괘를 밟으며 저녁은 스밀뿐 어둠은 하염없이 돋아나는 권태가 되기에 손색없다 (시인에게 듣는 시작메모) 사람들은 미래를 보고싶어 하고 궁금해 하고 예측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측이 일기예보라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내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 걸어온길을 보면 신발을 보면 그사람의(길)내일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에서
문신 시인 / 무지무지 긴 뱀의 겨울 잠
무지무지 기다란 뱀이 겨울잠을 자러 깜깜한 구멍으로 들어갑니다
눈꺼풀이 반도 넘게 감긴 이마가 구멍으로 들어 가는 동안
뱀의 가슴이 가을 낙엽 위를 스삭스삭 지나가는 중입니다
뱀의 허리가 여름 소나기에 등줄기를 흠뻑 적시 는 중입니다
뱀의 꼬리가 봄날 담벼락에 척 늘어져 꾸벅꾸벅 조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뱀 대가리만 눈을 꼭 감고 긴긴 겨울잠을 잡니다
문신 시인 / 아내와 다툴 일이 아니다
아내와 다투고 침묵으로 하루를 보낸다. 입을 닫으니 귀가 예민해진다 아내가 부엌에서 혼잣말하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 발가락 끝에서 핏줄 튀는 소리 그리고 고요 소리
고요 소리도 이렇게 소란한 것을 고요에 너무 많은 소란을 더해준 것 같다. 종일 침묵했어도 고요하지 않다. 사는 동안 이다지고 심란해지는 일이라니
더는 아내와 다툴 일이 아니다.
문신 시인 /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저녁이 오는 동안 혀끝이 쓰라리다 후박나무에 비가 내렸다 쓰라리다 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혀끝은 쓰라리고 하루, 어쩌면 온종일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쓰라리지 않기 위해 울음보다 가볍다는 소리까지 몽땅 토해냈는데도 후박나무가 젖는다 혀끝에 박혀 있는 저녁, 어깨를 굽힌 사람이나 턱을 치켜든 사람이나 저녁에 닿는 일은 쓰라림에 닿는 일 후박나무는 후박나무답게 저녁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므로 견습생 같은 삶이라도 어설퍼서는 안 된다 잠시 비를 긋는 심정으로 후박나무에 기대면 저녁으로 모여든 빗물이 어깨에 스미고 신의 허락 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지만 사랑하는사람을 땅에 묻고 돌아온 사람만큼은 신도 외면하고 싶은 저녁 후박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빗물이 신의 혀끝에 박힌다 쓰라리다 인간이 눈 감는 시간을 기다려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문신 시인 /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나는 지금 앵두나무 아래 서 있다 봄날처럼 앵두나무는 무성한데 앵두는 없고 글썽하게 앵두를 훑던 바람만 갈팡질팡이다
지금 앵두나무를 지탱하는 건 자기 뿌리를 향해 무너지는 앵두의 그림자들, 그림자들을 밟고 가는 맨발들, 맨 발들 위로 다시 솟아난 종아리들, 끝이 뾰족한 풀잎들
누군가 밤새 파헤치다 만 앵두나무 뿌리를 들썩이며 나는 앵두를 물들이던 붉은 저녁에 대해 생각한다
대배우 마릴린 먼로 말고는 떠올릴 사람이 없다
오로지 붉은, 생각만으로도 출출하게 흘러내리는 봄날 더는 머물 수 없어
나는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처럼 앵두나무 그늘에 서 있다
문신 시인 /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슬슬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친 뜩 떼고 돌아앉는거야
젊은 스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깔깔 웃어보아도 좋을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누워도 좋을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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