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산 시인 / 부끄럽게도 외 6편
윤석산 시인 /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윤석산 시인 / 버튼, 우리의 오늘
버튼을 누르면 우리의 오늘은 시작된다. 부팅되며 떠오르는 화면 속, 커서가 깜박이고 비로소 열리는 사고의 지평
갈기를 휘날리며 말들 시간 속 가로 지른다 화면 속 벗어나고 싶은 유목의 후예들 말이 말을 하며 말이 말로 달리는 화면의 평원의.
우리의 오늘
버튼을 누르며 그렇게 마감된
윤석산 시인 / 눈보라
헤아릴 수 없이 휘날리는 그 빽빽한 밀도 현란함으로 우리는 그러나 늘 아득하기만 한 우리를 가둔 그 순백의 시간 그래서 우리 모두 황홀한 방황일 뿐이네.
-계간 『미네르바』 2023년 겨울호 발표
윤석산 시인 / 붓에게 말을 우리 정다운 이웃들 서로 어쩌지 못하는 가슴 붙안고 너는 나의 이름으로, 나는 너의 가슴으로 함성처럼 이 거리를 떠밀려 갈 때 붓은 떳떳했던가, 떳떳했던가. 새벽을 밟으며 다가오는 건강한 발자국 소리 사람의 마을에는 하나 둘 등불이 밝혀지고 내밀한 목청으로 조금씩 조금씩 살아나는 우리의 절박한 바람. 우리의 붓은 과연 바람 만큼이나 절박했던가, 절박했던가.
윤석산 시인 / 토요일 아침 신문을 읽으며
토요일 아침, 조간 신문 토요 섹션을 본다. 신문 첫 면에는 한쪽 팔이 없는 부인과 한쪽 다리를 못 쓰는 남편이 서로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서 있다. 신문을 넘기고 넘겨 맨 마지막 면에 이르면, 팔십 세 소년이 팔십 세 소녀 부인의 손을 잡고 방긋이 웃고 있다.
손을 잡으면, 누구나 웃는구나 손을 잡으면 누구나 마음이 환해지는구나 팔이 한쪽 없어도, 한쪽 다리가 불편해도 나이가 팔순이 넘어도 손을 잡으면 누구나 세상을 향해 웃을 수 있구나 그래서 세상의 앞면과 뒷면 모두를 장식하는구나.
토요일 싱그러운 아침을 열며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이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의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걸어 나온다. 팔순이 훨씬 지나도 스물같이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계면쩍음도 없이 서로 손 꼭 잡고 한 장 한 장 또 한 장 세상 넘기고 계신다.
윤석산 시인 / 열쇠고리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되질 않지만 나의 삶 어디쯤 한 뭉치 열쇠고리 늘 덜거덕거리고 있었다 자동차 키, 집 열쇠, 사무실 키, 캡스 장치, 세상의 잡다함을 주어 담은 유에스비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된 지 오래인 열쇠고리, 오늘도 잊지 않으려고 나는 애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이내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그래서 오늘도 난 열쇠고리에 매달려 진종일 거리를 쏘다닌다. 집을 나서며 문이 단단히 잠겼나, 캡스는 잘 되었나 몇 번을 시도하고는, 이내 자동차 시동을 켜고, 거리를 달리고 달려 다다른 사무실 문을 따고 컴퓨터를 켜고, 유에스비를 장착하고 그러나 열어도, 열어도 또 열어야만 하는 세상의 문들, 주르르 풀리지 않는 숙제마냥 도열되어 있는 그 앞의 결코 주눅 들지 않으려는 나, 나, 나. 덜거럭 시간 속 열쇠 만지작거리며 열쇠고리 무게만큼 한편으로 기울어진 내 삶의 슬픈 형평 조금도 추스를 염하지도 못한 채 덜거럭, 덜거럭 오늘도 진종일 세상의 문 서성이고 있다.
윤석산 시인 / 일요일, 전철 4호선
더운 지방에서 온 그들에겐 이제 막 다가온 겨울이 너무 춥다 목이 긴 장갑이며 귀마개까지 서울로 가는 4호선 일요일 전철 안은 거뭇거뭇 피부가 다른 사내들로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뭇잎 성긴 한국의 초겨울 풍경을 본다. 처음 맞는 겨울이 어떠한 것인지 아직 그들은 모른다. 한국이 제2의 고향이 될지, 아니면 무엇이 될지도 그들은 아직 모른다.
한 주일의 노동을 끝내고 구간구간 멈추는 이름도 낯선 역에서는 꾸역꾸역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타고 사람들은 그저 무심코 그들을 한번쯤 바라다볼 뿐
종착역 어딘가에 얼마나 혹독한 겨울이 웅크리고 있을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목이 긴 장갑이며 귀마개로도 결코 이울 수 없는 도 다른 생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아직 그들은 모른다.
다만 서울이 '세울' 인 줄로만 아는 그들. 한 주일의 노동의 피로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일요일 아침, 서울로 가는 4호선 전철 안에는 이방의 언어로 나직이 낯선 저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그들, 그들이 거뭇거뭇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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