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유자 시인 / 역광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5. 20:18

김유자 시인 / 역광

봄이 왔구나, 생각이

다 가기도 전에 여름이 올 것이다

몸이 열리면 그림자는 사라지나

너를 지우려 병원에 갔었다, 라니

떼어 내거나 긁어내는 것, 아닌가

일기를 지운다

지우개에 긁혀 노트가 찢긴다

그림자를 떼어 낸다

어떤 모습을 원하는 거야

어디로 가고 싶니

마음이 봄을 끌어당긴다

그림자가 흩어진다

머리카락과 숨은 스스로 떠난다

두 눈을 긁어낸다

숨구멍이 모두 곤두선다

빛이 밝을수록

배경과 몸이 분리된다

새로 돋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

내가 없는 곳에서 전해진 세계가

생각 속에 쌓인다

여름이 봄을 지운다

 

 


 

 

김유자 시인 / 물고기의 가역반응

 

 

 외삼촌이 청첩장을 주고 가셨다

 그 애의 결혼식은 없다

 

 네가 그랬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이 네가 썰매 태웠다던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왼쪽 볼이 겨울 저수지처럼 딱딱해져 갔다

 

 그 애는 죽었다

 

 얼어붙은 저수지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 애에게 무릎을 쪼그려 앉게 하고, 앞에서 나는 그 애의 손을 잡았다, 달렸다, 신난다, 그 애의 소리가 들렸다, 더 빨리 달렸다, 얼어붙은 물결이 화난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았다 물결에 걸려 그 애가 넘어졌다 꽃잎, 꽃잎, 꽃잎, 얼음 위에 피가 스며들었다 손톱 속 봉숭아 물처럼

 

 그 애는 죽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방에서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흰 얼음 위에 피가 섬뜩했지만 내 몸이 뜨거워졌다 잡혀 올라온 물고기처럼 가슴이 펄떡거렸다 나는 몰려든 아이들 뒤에 있었다

 

 나는 집에 있었다

 나는 저수지에 간 적이 없다

 

 그 애는 죽을지도 모른다

 

 네가 여섯 살인가? 그 애가 네 살 때 이마가 찢어져 여덟 바늘이나 꿰맸잖니 기억 안 나? 너랑 저수지에 갔던 그날 말야 다행히 가로로 찢어져 이젠 흉터도 잘 안 보여 외삼촌 말에 내 왼쪽 볼이 지느러미를 쫙 폈다

 


 

김유자 시인 / 상담​

​새장 문이 열려있다

나의 외투 깃이 흘러내린다

모자는 최선을 다해 나의 표정을 만든다

앉아있는 나의 벌어진 다리,

구두 각각에 구겨진 주름 방향이 다르다

왼손이 쥐고 있는

가방속이 더부룩하다

주먹쥔 오른손 그림자가

벽으로 스며든다

새장 안은 어둡다

네 개의 눈이 들여다본다

입과 귀로 가득 찬 철창,

철창 안 새의 꼬리가 어둠에 지워져있다, 비행을 위해

꼬리는 짧게 퇴화되었다

벽에 스며든

오른손 그림자가 주먹을 펴기 시작한다 새가 지워진 꼬리를 편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퇴화되지 않은 꼬리를 나는

지녔다고 한다

어둠 속으로 외투가 떨어진다 그림자에서 들어 올린 모자색이 변한다

새 구두에 넣은 발가락들이 구부러져 있는

미동도 없는 철창 속에 천 가지 새 소리가 남아있다고 한다

왜죠? 가방이 열린 채 새장 문에 걸려있다

 

 


 

 

김유자 시인 / 새는 검고 유리창은 차고

 

 

 유리창은 누운 내 얼굴 위에서 어두워지고 환해진다

 내 표정을 유리창이 만든다

 

 집을 나서면 유리창은

 얼굴에서 열렸다 닫히곤 한다 얼굴 속으로

 새 소리가 흘러든다 어느 땐

 

 얼굴 속으로 들어온 새가 문을 찾지 못해 오래

 푸드덕거린다 그런 날이면

 유리창은 검은 깃털을 내 머리에 흩뿌린다

 

 검은 깃털 위로 아침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날,

 몸을 일으킨 나는

 유리창에 뺨을 댄다

 

 오래 맞대고 있어도

 차가운 유리창은 여전히 차갑다 내 얼굴은

 

 끝내 문을 찾지 못한 새를 간직하고 있다

 그 위로 오늘밤

 유리창은 문 닫는다 어둠이

 

 유리 긁어대는 소리 멈추지 않는다

 

-<한국시인>, 2023, 4월호

 

 


 

 

김유자 시인 / 우아한 세계

 

 

긴 오른 다리를 오른쪽으로 뻗는다

긴 왼 다리를 왼쪽으로 뻗는다

긴 목 위의 주둥이가 웅덩이에 닿기까지

기린은 오래 걸리고

사자는 이때를 노리고

 

요즘은 왜 요리가 맛집이 관심사인가

사회학자는 현상을 연구하겠지만

늘 가던 식당을 나는 한동안 못 가겠지만

천천히 장(腸)을 내려가는 음식같이

맛집 앞에 줄을 서서

 

길고 긴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를 가고 있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물결을 따라 올라와

기린의 식도에 걸려 파닥이는 송사리처럼

그러나 결국 녹아내리는 슬픔처럼

 

막혀 있던 하수구는 뚫리고

나는 다시

늘 가던 식당에 앉아 있거나

기린은 길고 기차는 빠르거나 여전히

소화되고 있는

 

이 세계는 언제나 목이 마르고

죽음 앞에서 우아하게 천천히

두 발을 뻗으며

 

-시집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에서

 

 


 

 

김유자 시인 / 문고리 없는 숲

 

 

서랍 속에 누워있다

밤을 좋아하지만 밤은 계속 밤이다

서랍 속에는 문고리가 없다

 

덜그럭거리는 심장

열리지 않는 생각

 

밖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 없는 세계는 이야기일 뿐

나 있는 세계도 여기에선 이야기여서

 

울창한 그림자에 담겨 나는

하늘을 떠올린다 구름이 거으르게 흐르고 바람이 내려앉지 못하고

별들은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고 빛이 내달리고

구름과 땅을 비가 꿰맬 때,

 

당신은 책상 위에 시침처럼 엎드려 있다

여전히 밤인데도

당신의 심장이 문을 두드린다

 

눈 덮인 숲에서 나무들이 컹컹 짖고

눈처럼 먼지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흔들리고 새들이 떨어져 내리고

나는 쓸려가지 않으려 이야기를 힘주어 붙든다

 

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문고리 없는 생각이 펼쳐진다

 

-《발견》 2019. 겨울호

 

 


 

김유자 시인

충북 충주 출생.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고백하는 몸들』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 제18회 한국시인협회 젊은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