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임 시인 / 첫사랑 외 5편
서정임 시인 / 첫사랑
병원 정원을 걷다 보았다 풀잎에 붙어 있는 이슬방울들
나도 한때 저리 맑은 눈동자를 빛나게 했던 초록이던 때가 있었다
서정임 시인 / 어둡고 환한 문장들 -거미는 꼬리가 길다. 호박화석 속에서 1억 년 보존된 꼬리 달린 거미 조상이 발견되었다
넝쿨장미가 피었다. 기다랗게 목을 치켜세우며 겹겹 꽃잎을 터트린다 붉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구두를 본다 굽 높은 킬힐이다 노랗고 파란색색컬러다
한권의 책이 죽는다 넘지 말아야할 담장을 넘어서는 넝쿨장미
그는 누구인가 너는 왜 내 앞에서 부재한 그를 토해놓는가
읽지 못한 한 권의 책이 스며든다 마지못해 귀를 기울이는 눈빛에 더더욱 피어나는 목소리
더위가 몰려온다 문과 문을 모조리 열어젖히고픈 지루함이 몰려온다 내가 너를 포획하고 네가 나를 포획하고 해체하는 우리 안에 내재된 오래된 근성, 버릴 수 없는
몇 달 만에 만난 너와 내가 나누어야 할 대화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 권의 책에 대한 감상문 속에 들어있는 수없는 가시들
나도나도 모르게 네가 모르는 너를 풀어놓았던 시간이 떠오르고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한 나는 먼 훗날 저 허공 어디쯤에서 또 다른 나로 써질 것인가 여전히 끝날 줄 모르는 문장을 토하고 있는 붉은 입술의 넝쿨장미가 뜨겁다
서정임 시인 / 견우성에 들다
이조(李朝)에서 설렁탕을 먹는다 숭숭 썰어놓은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사골국물에서 우설(牛舌)이 건져진다 살아서 못다 부른 목마른 노래가 입안에서 비릿하게 씹힌다 죽음마저도 녹여내지 못한 납작하게 저며진 한 조각의 비애는 어느 견우가 이 세상 마지막에 남겨놓고 간 흔적인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자신을 무쇠 솥 안에 가두고 사흘 밤낮 지펴지는 장작불을 끌어안는 일이다 한 방울의 욕망까지도 남김없이 우려내 완전한 소멸의 기쁨을 진국으로 맛보는 일이다 그 진한 일념에 이승과 저승의 오작교를 건너갔을 백색 사랑에 붉은 깍두기를 베어 무는 한낮, 내가 뜨거워진다 백 년 전통 식당을 나서는 골목길이 국수 가닥처럼 풀어져 있다 문득 낮달 뜬 하늘에 고삐 꿰인 또 다른 소가 지나간다 우직한 눈망울이 젖어 있다
서정임 시인 / 뼈 없는 뼈
먹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붓을 씻어 내 말리다 붓대에 스며들어있는 검은 얼룩을 본다 씻어도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일평생 오점 하나 남기지 않으려 속을 텅텅 비우며 청정히 살아온 저 대나무도 밑동에 족제비 털을 꼬리로다는 순간 전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인데 그 맑던 낯빛에 뒤집어쓰고 있는 오욕의 그림자들
낭창낭창휘어지는 뼈 없는 무방향의 꼬리의 힘이란 저토록 무서운 것인가
나는 오늘 하루 내안에 보이지 않게 달고 있는 꼬리 제대로 간수했는지 혹여 나도 모르게 삐져나온 꼬리털 한 오라기 휘둘림에 누군가 생이 뒤바뀐 것 아닌지 뼈 없는 뼈를 가지런히 모아 세워보는 것인데 새삼 꼬리뼈 한 번 다시 만져보는 것인데
서정임 시인 / 채석강
그동안 틈만 나면 떡살을 얹어 온 대를 잇는 떡집이다
비 오는 날 거대한 떡이 익어가는 김이 오른다 먼 백악기부터 공룡들과 따개비와 고속도로를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갯강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시간을 사서 들고가는 저 오래된 떡집
떡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읽는다 차마 멀리 썰물에 쓸려 보내지 못한 채 한 알 한 알 알갱이로 가슴에 박힌 사연을 켜켜이 쌓아둔 그리하여 끝끝내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떡시루에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그 뼈아픈 회한을 읽는다
두 팔 걷어 올리고 오늘도 거대한 시루에 떡살을 안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쁘다
서정임 시인 / 앵두나무 꽃이 피는 시간
환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꽃들 조잘조잘 기억이 피어나온다
시간이 흘러도 앵두는 앵두다 한 분단 두 분단 나란히 줄지어 앉아 덧셈 뺄셈을 배우던 작은 꽃들이다
기억이 기억을 물고 나온다 제 각기 각인된 계절과 그날의 날씨
기억과 기억이 교차하고 냉탕과 온탕을 부드럽게 오가는 오늘의 기후
뒷자리 앉아 머리카락을 한 번씩 잡아당겼다는 친구는 친구를 향해 눈을 흘기고 명절이면 부잣집으로 몰려가 한 상 차려주는 음식으로 그동안 주린 배를 채웠다는 아이들 누구나 한 번씩은 사 먹었다는 독사탕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도 해마다 피어나는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가 한 뿌리 한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는 우리의 초등학교 동창회 해가 갈수록 그 시간의 켜가 두텁게 쌓이는
올해도 한바탕 꽃을 피워내고 있는 앵두나무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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