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서정임 시인 / 첫사랑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5. 21:38

서정임 시인 / 첫사랑

 

 

병원 정원을 걷다 보았다

풀잎에 붙어 있는 이슬방울들

 

나도 한때

저리 맑은 눈동자를 빛나게 했던

초록이던 때가 있었다

 

 


 

 

서정임 시인 / 어둡고 환한 문장들

-거미는 꼬리가 길다. 호박화석 속에서 1억 년 보존된

꼬리 달린 거미 조상이 발견되었다

 

 

넝쿨장미가 피었다.

기다랗게 목을 치켜세우며 겹겹 꽃잎을 터트린다 붉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구두를 본다 굽 높은 킬힐이다 노랗고 파란색색컬러다

 

한권의 책이 죽는다

넘지 말아야할 담장을 넘어서는 넝쿨장미

 

그는 누구인가

너는 왜 내 앞에서 부재한 그를 토해놓는가

 

읽지 못한 한 권의 책이 스며든다

마지못해 귀를 기울이는 눈빛에 더더욱 피어나는 목소리

 

더위가 몰려온다 문과 문을 모조리 열어젖히고픈 지루함이 몰려온다

내가 너를 포획하고

네가 나를 포획하고

해체하는

우리 안에 내재된 오래된 근성, 버릴 수 없는

 

몇 달 만에 만난 너와 내가 나누어야 할 대화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 권의 책에 대한 감상문 속에 들어있는 수없는 가시들

 

나도나도 모르게 네가 모르는 너를 풀어놓았던 시간이 떠오르고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한 나는 먼 훗날 저 허공 어디쯤에서 또 다른 나로 써질 것인가

여전히 끝날 줄 모르는 문장을 토하고 있는 붉은 입술의

넝쿨장미가 뜨겁다

 


 

서정임 시인 / 견우성에 들다

 

 

이조(李朝)에서 설렁탕을 먹는다

숭숭 썰어놓은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사골국물에서 우설(牛舌)이 건져진다

살아서 못다 부른 목마른 노래가

입안에서 비릿하게 씹힌다

죽음마저도 녹여내지 못한

납작하게 저며진 한 조각의 비애는

어느 견우가 이 세상 마지막에 남겨놓고 간 흔적인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자신을 무쇠 솥 안에 가두고 사흘 밤낮 지펴지는

장작불을 끌어안는 일이다

한 방울의 욕망까지도 남김없이 우려내

완전한 소멸의 기쁨을 진국으로 맛보는 일이다

그 진한 일념에

이승과 저승의 오작교를 건너갔을 백색 사랑에

붉은 깍두기를 베어 무는 한낮, 내가 뜨거워진다

백 년 전통 식당을 나서는 골목길이

국수 가닥처럼 풀어져 있다

문득 낮달 뜬 하늘에

고삐 꿰인 또 다른 소가 지나간다

우직한 눈망울이 젖어 있다

 

 


 

 

서정임 시인 / 뼈 없는 뼈

 

 

먹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붓을 씻어 내 말리다

붓대에 스며들어있는 검은 얼룩을 본다

씻어도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일평생 오점 하나 남기지 않으려 속을 텅텅 비우며

청정히 살아온 저 대나무도

밑동에 족제비 털을 꼬리로다는 순간

전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인데

그 맑던 낯빛에 뒤집어쓰고 있는 오욕의 그림자들

 

낭창낭창휘어지는

뼈 없는 무방향의 꼬리의 힘이란 저토록 무서운 것인가

 

나는 오늘 하루 내안에 보이지 않게 달고 있는 꼬리

제대로 간수했는지

혹여 나도 모르게 삐져나온 꼬리털 한 오라기 휘둘림에

누군가 생이 뒤바뀐 것 아닌지

뼈 없는 뼈를 가지런히 모아 세워보는 것인데

새삼 꼬리뼈 한 번 다시 만져보는 것인데

 

 


 

 

서정임 시인 / 채석강

 

 

그동안 틈만 나면 떡살을 얹어 온

대를 잇는 떡집이다

 

비 오는 날 거대한 떡이 익어가는 김이 오른다

먼 백악기부터 공룡들과 따개비와

고속도로를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갯강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시간을 사서 들고가는 저 오래된 떡집

 

떡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읽는다

차마 멀리 썰물에 쓸려 보내지 못한 채

한 알 한 알 알갱이로 가슴에 박힌 사연을

켜켜이 쌓아둔

그리하여 끝끝내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떡시루에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그 뼈아픈 회한을 읽는다

 

두 팔 걷어 올리고

오늘도 거대한 시루에 떡살을 안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쁘다

 

 


 

 

서정임 시인 / 앵두나무 꽃이 피는 시간

 

 

환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꽃들

조잘조잘 기억이 피어나온다

 

시간이 흘러도 앵두는 앵두다

한 분단 두 분단 나란히 줄지어 앉아

덧셈 뺄셈을 배우던 작은 꽃들이다

 

기억이 기억을 물고 나온다

제 각기 각인된 계절과 그날의 날씨

 

기억과 기억이 교차하고

냉탕과 온탕을 부드럽게 오가는 오늘의 기후

 

뒷자리 앉아 머리카락을 한 번씩 잡아당겼다는

친구는 친구를 향해 눈을 흘기고

명절이면 부잣집으로 몰려가

한 상 차려주는 음식으로 그동안 주린 배를 채웠다는 아이들

누구나 한 번씩은 사 먹었다는 독사탕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도

해마다 피어나는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가 한 뿌리 한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는

우리의 초등학교 동창회

해가 갈수록 그 시간의 켜가 두텁게 쌓이는

 

올해도 한바탕 꽃을 피워내고 있는 앵두나무가 환하다

 

 


 

서정임 시인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2006년 《문학·선》으로 등단. 2012년 문예진흥금수혜. 시집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 『아몬드를 먹는 고양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