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은산 시인 / 삽의 소리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5. 21:56

고은산 시인 / 삽의 소리

 

 

바짝 마른 추위 몇 장 두터이 쌓인 시골 경로당에서

창문 밖으로 고무줄의 음성이 들린다

오후의 차가운 햇빛은

허공의 혈관을 수축한다

수축되는 것이 부정적 빛깔로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의 동공은 움츠리고

세상의 분명한 얼굴은

비좁아질 것이다

 

지금, 좁아진 시력의 확장을 꿈꾸는

한 시골 청년은 오늘 일거리를 찾아

인근 도시의 인력사무실로 향한다

 

그의 발바닥 압력이 푸르게 펄럭이는

일터, 오늘 그의 삽질은

동백꽃 피는 소리 들으며 지상을 찢고 찢는다

찢는 소리가 지상에 흉터를 내고

찢는 움직임마다 추위를 상쇄한다

상쇄하는 소리 몇 줌 가족들의 어깨 위에

푸른 솔잎으로 안착하며

점점 얇아지는 햇살 떨어지는 소리는

삽질을 중지시킨다

중지의 느슨한 맥박은

팔뚝 근육을 이완한다

 

옆에 드러누운 삽질의, 하루의 음성, 저녁녘을 지나며

그의 가정 가계부 위를 쪽빛 볼펜 색깔로

한 장 가득 긋는다

 

드러누운 삽질 위로 별빛이 쌓이고

내일의 푸른 생계를 기다리는 사람들,

호명하는 삽의 내재된 소리는

달빛 아래 누워 커져만 간다

 

-시집 『실존의 정반합』에서

 

 


 

 

고은산 시인 /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쉰다

 

 

피라미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햇살을 품고 있습니다.

물 밑 자갈들은 청아한 물길의

갈 곳을 묻고 또 묻습니다.

어린 아이가 고기를 잡으려고

물 안으로 손을 넣습니다.

반바지에 하얀 종아리, 물빛보다

반짝이는 시간을 검정고무신에 담습니다.

시냇가 버드나무는 오랜 세월 얼마나

물장난을 쳤는지 밑동이 검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버드나무 아래로는 조용한 피라미 안식처가

난장입니다.

아, 잡았다.

맑은 절집 같은 시냇가의 고막을 터트립니다.

뛰는 마음을 낚아 챈 그의 손에 숨바꼭질 놀이하며

뛰어 노는 어린이의 몸짓이 파닥거립니다.

시냇가는 태초부터 정결했습니다.

거기에 엄마젖을 뗀지 5년이 지난 어린 아이가

풍덩 거립니다.

거짓말 한 번 하지 않은 피라미는 태생부터

시냇물에서만 자라왔습니다.

그는 검정고무신 속에 오늘을 담습니다.

검정고무신 한 짝 이 더 검게 빛납니다.

풍덩거림은 청색 심장의 울렁임입니다.

 

시냇가의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시집 『말이 은도금되다』에서

 


 

고은산 시인 / 레드향

 

 

 억눌린 감각을 머금은 도시 풍경의 해충 같은 동요는 네 전령자로 나서는 낡은 풍금 소리로 비릿한 계절들을 수 년 휭단했다

 계절의 횡단 중간쯤마다 가장 큰 성충처럼 길러질 땐 찬양의 역풍은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드물게, 미풍이 흐르는 시각의 눈동자는 번뜩이는 별빛 향을 미숙하게 흡입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날은 네 동공 빛을 휘는 싸늘한 바람의 통성명들에 거친 모습으로 대답하곤 했다 네 망막 속으로 구르는 내핍은 여울목의 정중앙에서 굽이치고 여울목에 휩싸인 궁여지책들은 아카시아 가시 같은, 비트적거리는 네 실존을 부유시킨다 그 부유의 인과는 대형마트를 큰 대출금으로 인수한 후 시작되었다

 대출금의, 암투의 착색着色은 오랫동안 창백했다 축축한 쇳대의 청천벽력은 흔들리는 잠금으로 이어진 은행 이자의 팽창으로 형성된, 약화된 잠금의 파손이다

 

 버들잎 같은 파손의 혁파는 주택 담보로 시작한 작은 과일 가게의 개업이었다

 

 그 혁파의 물줄기는 차근차근 익충 같은 물결로 가게 내부를 감싸고 있었으며 레드향처럼 익어갔다

 

 지금, 네 사유 몇 조각, 레드향을 시큼시큼 씹으며 푸른 내일을 준비한다

 

 


 

 

고은산 시인 / 부품의 각도 틈으로 쇠별꽃이 흐르다

 

 

자동차 부품을 바라보는 눈빛은 허름했다

흉터가 약간 보이는 팔뚝과

카센터의 기름은 공감각적 언어로 흐를 때

인과관계를 유지한다

 

조직적인 부품을 풀어헤치고 조이는

행동은 개악을 멀리하는 습성을 가진다

 

명백을 선호하는 수리의 이면은 복잡하다

 

거의 목적을 이룬 나사들 죄임의 높아지는 횟수는

단단한 손목에 일감을 줄인다

 

나사 회전이 새싹의 빛깔로 돌고 돌아 한 생을 고정한다

 

끝마친 수리를 들고 가는 차바퀴는 도심을 정교하게

휘젓는다

 

타이어의 마모 깊이는 자동차 생명을 위축한다

 

도심 속 속도를 밀고 가는 백미러 속 행렬이

잠깐, 길게 눕는다

 

다시 팽팽한 언어를 타이어가 싣고 쉼 없이 도로를 누른다

 

부품들의 놓인 각도들은 이제 정확하다

 

정확해진 쾌활한 속력의 자동차 내면 틈마다

쇠별꽃 색깔의 동력이 빽빽하게 흐른다

 

작은 자동차 바퀴들 회전 횟수들 마모 역사는 제법 길다

 

지금, 차량 행렬 하나의 반듯한 범퍼는 수평을 따라

장밋빛으로 정면을 깨며 집 쪽으로 전진을 계속한다

 

 


 

 

고은산 시인 / 잘 정렬된 목뼈

 

 

매혹의 물결을 잃어버린 립스틱 색깔의

한 生, 한숨을 길가 작은 수퍼마켓의 평상이

수 년 동안 삐거덕거리며 들어왔다

 

눈앞으로 펼쳐진 산맥으로 굽이치는

단조 가락풍 기억의 세포들

 

세포 사이마다엔 흔들리는 낡은 노끈 같은 회상이

빽빽이 들어있다

 

그 노끈을 당기는 중년의 시골 여성 손가락 마디가

오늘따라 더욱 시큰거린다

 

뇌졸증후유증으로 가파른 바위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편, 돌쩌귀에 걸린 찢어진 연서처럼

그녀의 맥박을 흔든다

 

마비된 병원비에 휘청이는 가계부는

서글픈 잉크 자국이 선명하다

 

잉크 자국들 저녁녘을 뚫으며

대뇌 속을 파리하게 긋는다

 

잔깐 사이, 멀리서 반듯한 하이힐 소리가

어스름을 밟으며 온다

 

막 도착한, 하이힐을 신은 둘째 딸의 입술 사이,

단풍나무 향이 흐른다

 

성실한 손목의 비누 거품 같은 힘이 미치는

딸의 손길은 지금, 어스름에 잔잔히 겹쳐진다

 

그녀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딸의

치열은 민트 빛으로 포획한 음식을 씹는다

 

가계 장부 위로 푸르른 잉크 자국이

선혈처럼 찍히며,

 

돈이 없어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편의 재활 치료도 가능하다

 

이제, 삐거덕거리던 평상 위로 잘 정렬된 목뼈 같은

언어들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 들릴 것이다

 

 -『애지』 2015-여름호

 

 


 

 

고은산 시인 /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쉰다

 

 

피라미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햇살을 품고 있습니다.

물 밑 자갈들은 청아한 물길의

갈 곳을 묻고 또 묻습니다.

어린 아이가 고기를 잡으려고

물 안으로 손을 넣습니다.

반바지에 하얀 종아리, 물빛보다

반짝이는 시간을 검정고무신에 담습니다.

시냇가 버드나무는 오랜 세월 얼마나

물장난을 쳤는지 밑동이 검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버드나무 아래로는 조용한 피라미 안식처가

난장입니다.

아, 잡았다.

맑은 절집 같은 시냇가의 고막을 터트립니다.

뛰는 마음을 낚아 챈 그의 손에 숨바꼭질 놀이하며

뛰어 노는 어린이의 몸짓이 파닥거립니다.

시냇가는 태초부터 정결했습니다.

거기에 엄마젖을 뗀지 5년이 지난 어린 아이가

풍덩 거립니다.

거짓말 한 번 하지 않은 피라미는 태생부터

시냇물에서만 자라왔습니다.

그는 검정고무신 속에 오늘을 담습니다.

검정고무신 한 짝이 더 검게 빛납니다.

풍덩거림은 청색 심장의 울렁임입니다.

 

시냇가 의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시집 <말이 도금되다>에서

 

 


 

고은산 시인

전북 정읍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말이 은도금되다』 『버팀목의 칸탄도』 『실존의 정반합』.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