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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그리움과 기도는 켜켜이 쌓이고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2.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그리움과 기도는 켜켜이 쌓이고

하늘로 보낸 편지, 성직자 묘역 기도함에 담긴 이야기들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 서울대교구 용인 성직자묘역 입구에 세워진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기도함.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흘렀지만 김 추기경을 그리워하는 신자들의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 성직자묘역 입구에 세워진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기도함에는 신자들의 바람이 담긴 편지가 가득하다. 지난 10년, 편지에 담긴 신자들의 편지 지향을 통해 김 추기경을 향한 그리움과 신앙의 자화상을 살펴본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의 유지를 잇고 있는 단체들을 소개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 새겨진 빨간 기도함에는 지금도 추모객들의 편지가 쌓이고 있다. 묘원 측에서 따로 보관한 것만 따져도 편지 수는 수천 통에 달한다.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추기경이 남긴 정신을 잊지 않고 그 유지를 이어가겠다” “김 추기경이 그립고 보고 싶다”는 사연이 담긴 편지들이 눈에 띈다.

 

“생전에 웃으시던 선한 눈매가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스스로 바보라 낮추시어 교만한 우리를 오히려 꾸짖으신 김수환 추기경님, 그립습니다. 남겨진 이들이 해야 할 일들을 몸으로 보여주신 추기경님, 조금이나마 그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며 살겠습니다. 추기경님, 사랑합니다.” -요아킴-

 

“당신은 저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과 나눔을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이행하겠습니다.” -박 세라피나-

 

“늘 미소 지으시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주님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지요.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 실천하긴 어렵지만 늘 맘에 새기며 살고 있겠습니다. 언젠가는 함께 뵙길 기대하며….” -무명-

 

이제 한글을 막 뗀듯한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아이들의 편지는 보는 이들을 웃음 짓게 한다. “추기경 할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내용부터 “떡볶이 많이 먹게 해주세요” “강아지 키울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핸드폰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아이다운 청원은 할아버지를 조르는 손주의 애교 같다.

 

개인 청원을 담은 편지도 많다. “돌아가신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성가정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술만 먹는 남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합니다” “자녀가 냉담을 풀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전구뿐 아니라 “아들딸 결혼하게 해주세요” “취직하게 도와주세요” “자녀의 대학 합격을 기원합니다” “금전적으로 겪는 어려움 해결해 주세요” 등 기복적인 것도 적지 않다. 심지어 보유한 주택이 “○억 ○천에 팔리게 도와주세요” “로또 2등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다이어트 성공해 ○○㎏ 빠지게 도와주세요”라는 글도 있다.

 

청원 내용만큼 용지도 다양하다. 연습장을 찢어 쓴 편지부터 붙임쪽지에 적거나 편지 봉투를 펼쳐 쓴 편지도 있다. 심지어 카드 영수증에 청원을 담은 경우도 있다. 지금은 묘역 입구에 색종이가 준비돼 있어 다른 규격의 편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신자들의 편지에는 김 추기경을 향한 그리움과 평상시 겪는 어려움을 속 시원히 풀 곳 없는 신자들의 팍팍한 마음이 어우러져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청빈의 목소리와 소외된 이들 향한 사랑은 커져가고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것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김수환 추기경(가운데)과 관계자들이 2005년 2월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옹기장학회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雅號)는 ‘옹기’다.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습니다. 곡식도 담고 오물도 담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그릇입니다. 우리 자신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오물조차 기꺼이 품어 안은 사람, 세상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런 소망을 담아 자신의 아호를 옹기로 정했다고 생전에 밝힌 적이 있다.

 

김 추기경의 아호에서 이름을 딴 ‘옹기장학회’는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포용하려는 그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옹기장학회는 통일 이후 북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제를 양성할 목적으로 박신언 몬시뇰이 김 추기경에게 장학회 설립을 건의하고. 이에 김 추기경이 사재를 털어 참여함으로써 2002년 11월 설립됐다. 2010년 2월 김 추기경 선종 1주기를 맞아 서울대교구 공식 사업으로 전환한 옹기장학회는, 북한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둔 신학생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지금까지 신학생 329명이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 이를 통해 배출된 사제만 55명에 이른다.

 

옹기장학회 운영위원장 박신언 몬시뇰은 “북녘 동포들을 애틋하게 마음에 뒀던 김수환 추기경은 지금도 한반도 평화와 사제 양성을 위해 쉼 없이 기도하고 계실 것”이라며 사제 양성의 유업을 흔들림 없이 이어나갈 것을 밝혔다.

 

옹기장학회는 매월 네 번째 월요일 오전 11시 서울 명동대성당 파밀리아 채플에서 회원 미사를, 매해 5월 김수환 추기경 묘소에서 김 추기경과 회원들의 부모 친지 형제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윤재선 기자 leoyun@cpbc.co.kr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위원장 나승구 신부)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 더 적극적인 사목을 펼쳐야 한다”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의지를 담아 1987년 4월 28일 도시빈민사목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당시는 서울 상계동 철거 사태 등 정부 주도의 반강제적 철거가 사회적 관심을 받던 때였다. 철거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빈민사목위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다. 김 추기경 스스로 빈민들의 삶의 현장을 수시로 방문했다. 직접 도시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청회에 참가해 당시 정부의 정책이 빈민을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1991년 빈민사목위 총무를 거쳐 제3대 빈민사목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이기우(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파견) 신부는 “당시 교회 안팎에는 김 추기경이 철거민을 비롯한 ‘빈민’들과 함께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시선이 존재했지만 김 추기경님은 흔들림 없이 빈민들과 함께했다”며 “추기경님은 가난한 이들과 진정으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교회도 가난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빈민사목위는 지난 32년 동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김수환 추기경 뜻에 따라 변함없이 가난한 이들의 곁을 지켰다. 1998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선교본당’과 ‘평화의 집’이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일자리 창출과 상담, 주거복지 증진을 도왔다. 빈민사목위는 지금도 청소년과 노숙인 돕기 운동에 앞장서며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보듬고자 노력하고 있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프라도 사제회

 

“제가 프라도회를 좋아하는 것은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과 좀 더 가까이 서 있고, 그들과 삶을 함께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가난한 자가 되신 예수님, 봉사하러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1995년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프라도 사제회 아시아 총회에서 한 말이다. 당시 김 추기경은 사제들에게 물질적 생활을 경계하고 복음적 가난을 살 것을 강조했다.

 

프라도 사제회는 복자 앙트완느 슈브리에(Antoine Chevrier, 1826~1878) 신부가 1860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프랑스 리옹에서 설립한 재속 사제회다. 이들은 교구에 소속돼 있으면서 정결ㆍ가난ㆍ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서약한다. 김 추기경은 프라도 사제회가 한국 교회에 들어오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프라도는 ‘밀밭’이란 뜻이다.

 

1970년대 초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 추기경은 프라도 사제회를 한국에 도입하기 위해 교구 신학생 두 명을 프랑스 리옹의 프라도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한국 프라도사제회는 1975년 9월 이용유(1945~1981) 신부가 명동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서약하면서 탄생했다. 프라도 사제들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찾아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지닌다. 이들은 특히 1970~80년대 노동자의 존엄성과 권리를 확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프라도 사제회 대표를 지낸 서울대교구 구요비 주교는 “김 추기경님께서 사제들에게 ‘자네들이 제대로 살길 바란다’는 말씀을 강하게 하셨다”면서 “사제들에게 정결, 순명도 힘들지만 내가 볼 때 제일 힘든 건 ‘청빈’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한국 프라도 사제회에는 130여 명의 사제가 활동하고 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

 

김수환 추기경이 펼친 사회사목 활동의 시작은 노동 분야였다. 1967년 마산교구장 시절, 노동문제에 투신하던 청년 단체인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노청) 제2대 총재 주교가 되면서다. 김 추기경은 산업화로 격변하던 당시 우리 사회에서 심각하게 일어나는 노동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김 추기경은 이듬해 발생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강화도의 방직공장인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공장 걸레’로 불리며 착취를 당하다가, 가노청 회원들을 중심으로 조합을 결성해 저항하다 해고당한 터였다. 김 추기경은 곧장 임시 주교회의를 열어 한국 주교단 명의로 공동 성명을 발표했고, 복직을 이끌어냈다. 이는 사회문제를 향한 한국 주교단의 첫 공동성명이었고, 노동권 가치를 알린 첫 성과의 중심에 김 추기경이 있었다.

 

1958년 발족한 가노청은 급속히 발전하는 산업화 속에 ‘노동권’, ‘노동조합’이란 말조차 잘 몰랐던 노동자의 ‘희망’이 됐다. 가노청은 1만 원 남짓한 월급에 살인적 노동 시간을 감내했던 노동자와 버스 안내양, 윤락 여성, 구두닦이 등 모든 노동자에게 신성한 노동의 의미를 전했다. 전국 조직으로 확산된 가노청 회원들은 교육, 심포지엄, 봉사활동, 노동운동, 현장 실태조사 등 노동권 신장을 위한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다. 김 추기경은 강연을 열어 노동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바라볼 것을 알리고,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을 적극 보호해줬다.

 

1968년 가노청 제4대 전국 여성회장을 지낸 윤순녀(수산나)씨는 “추기경님은 가노청 담당 사제들을 중심으로 노동사목 기구를 설치토록 하는 등 노동사목의 초석을 놓고, 노동자들과 함께하셨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 김수환 추기경이 1995년 12월 서울 봉천3동 소재 도시빈민가정 청소년 시설 꽃망울글방에서 어린이를 만나고 있다.

 

(재)바보의나눔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김 추기경은 자화상에 ‘바보’라고 적은 뒤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남을 위해 평생을 산 김 추기경. 그의 ‘바보 정신’을 이어받아 나눔의 열매를 맺고 있는 단체가 있다. 그가 뿌린 나눔의 씨앗 중 큰 열매를 맺고 있는 단체로 2010년 설립된 (재)바보의나눔이다.

 

바보의나눔은 종교와 지역, 계층을 초월해 국내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원한다. 형편이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 돌봄이 필요한 노인, 편견과 싸우며 살아가는 장애인과 다문화 가정 등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있다. 캄보디아, 네팔 등 해외 이웃에도 사랑을 전한다. 9년간 바보의나눔에 모인 성금은 약 630억 원. 바보의나눔은 도움이 필요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해 지금까지 약 473억 원을 지원했다.

 

바보의나눔 사무총장 우창원 신부는 “경기 침체에도 김 추기경의 삶과 정신에 공감해 성금을 보내오는 분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우 신부는 “바보처럼 산다는 건 물질을 중시하는 세상 기준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바보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며 “계산도 논리도 필요없이 마음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김 추기경이 바라신 바보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바보의나눔의 후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사람들이 서로 믿고 사랑하는 기적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김 추기경의 정신을 이어 앞으로도 세상에 온기를 전할 예정이다.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예수의 가르침 오롯이 산 추기경의 삶과 영성, 되새겨 살아야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 김수환 추기경은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꿈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진은 김 추기경이 1983년 12월 24일 난지도 빈민들을 위한 탁아소 ‘애기들의 집’을 방문해 그곳 주민들과 함께 성탄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모습.

 

 

‘그리스도를 닮은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김 추기경의 숨결과 음성, 신행(信行)이 하나 된 삶과 그 덕행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이는 김 추기경의 한 생애가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께 온전히 순명해 하느님과 이웃, 세상, 무엇보다도 자신과 화해함으로써 성덕을 이룬 삶의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추기경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59년의 사목적 삶에 대한 기억만은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찬례를 통해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기억하며 살아가듯이, 우리는 김 추기경의 영적 삶과 말씀, 성덕의 여정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살아가고자 한다. 기억은 실천을 동반한다. 잊으면 잃는다. 그렇다면 김 추기경이 살아간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에서 우리는 어떤 영성을 끌어낼 수 있을까?

 

밥의 영성- 낮추임

 

맨 먼저 떠오르는 건 ‘밥의 영성’이다. 날마다 우리가 영성체를 통해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고 그 힘으로 살아가듯, 김 추기경은 “서로에게 밥이 되라”고 당부하곤 했다. ‘밥이 되어주는’ 삶, 그 실천은 쉽지 않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마르 12,28-34)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기에 ‘밥’이 되어주어야만 이 땅에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가 구현될 수 있다.

 

김 추기경은 또 ‘모든 이의 밥이 되어주는’ 영성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삶으로 나아갔다. 사제로 사는 동안 평생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수품 상본에 시편 51장 1절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써넣고, 한평생 올곧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씻어주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목자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 낮춤의 영성이야말로 교회 구성원들이 깊이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가난의 영성

 

김 추기경의 평생 꿈은 사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추기경’으로 살라는 부르심에 순명해야 했기에 김 추기경은 “‘잠시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머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1983년 당시 서울 폐기물매립장 난지도에 ‘애기들의 집’이 세워지자 그해 성탄 때 직접 찾아가 난지도 주민들, 아기들과 함께했다. 1970년대 중반, 고 정일우(예수회) 신부와 고 제정구(바오로) 의원이 서울 양평동 철거민을 이끌고 경기도 시흥 신천리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김 추기경이 도움을 준 것도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려는 사목적 의지의 실천이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삶, 그 ‘가난의 영성’이야말로 날이 갈수록 심각한 양극화 문제로 신음하는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진정한 삶의 대안이다.

 

연대와 공동선의 삶

 

김 추기경의 사목 영성의 핵심은 ‘연대’와 ‘공동선’을 올곧게 실현해 나갔다는 데 있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확신한 김 추기경은 ‘적응과 쇄신’이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 언어로 새로운 복음화를 추구하는 데 투신했다. 서울대교구에 1976년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곧 서울 카리타스를 설립, 오늘날 우리나라 최대의 사회복지법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초를 놓은 이도, 자기 쇄신을 통해 교회의 현실 참여를 뒷받침한 이도 바로 김 추기경이었다.

 

그러기에 ‘세상 속의 교회’로서 우리는 김 추기경을 본받아 세상 속에서 ‘연대’와 ‘공동선’이라는 두 영성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너희와 모든(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표어가 김 추기경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표가 돼야 하는 이유다.

 

예수님께 대한 충실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 추기경의 삶에는 ‘예수님께 대한 충실성’이라는 영성이 자리 잡고 있다. 사제로서, 주교로서 김 추기경이 평생 지킨 성소는 다름 아닌 ‘예수의 길’이었다.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 걷는 사제가 되겠다”는 그 뜨거운 첫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먼저 내적 쇄신을 통해 자신을 복음화하는 데 먼저 주력하고 세상으로 나아가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김 추기경을 추모하는 길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김수환 추기경 사연 공모전 수상작] 바보 사랑 바보 사랑

문두연 돈보스코(의정부교구 맑은연못본당)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70년 걸렸다”

          하신 말씀 어제 같은데

          선종 10주년입니다

           

          바른 소리 세상의 진리

          온몸으로 밝혀

          세상의 환한 아침 열었습니다

           

          불의의 시대, 부끄러움으로

          어둠이 덮여도

          아무도 할 말 못한 눈먼 세상을

           

          환하게 비추신 하늘의 말씀

          바보 사랑 바보 사랑

          이셨습니다

           

          눈먼 이에게 각막 기증하신

          세상의 빛 추기경님을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세상 속으로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추기경님이 지나실 때마다

          세상의 겨울은 사라지고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바보 사랑 바보 사랑의

          봄이 오고 있습니다

           

          바보 나눔 사랑의 연결고리

          수레바퀴로 이어 주신

          당신 걸으신 길 새기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사랑의 실천과 당부 말씀

           

          등불로 밝히며

          영원토록

          우리 가슴에 담으렵니다

           

          바보 사랑 바보 사랑

          당신의 흔적 모두를

          사랑합니다.

 

 


 

 

[김수환 추기경 사연 공모전 수상작]

‘검은 닭’ 대접해서 미안해요

전인숙 수산나(원주교구 사북본당)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 주교 현장 체험을 위해 1985년 8월 27~29일 강원도 태백 사북 탄광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 주교 현장 체험을 위해 1985년 8월 27~29일 강원도 태백 사북 탄광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

 

 

벌써 10년이라니. 가톨릭평화방송을 보다가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이야기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고는 더 늦기 전에, 아니 내 기억이 온전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만난 그날 일을 기록하고 싶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검은 닭’이 연상된다. 검은 닭이라니, 아마도 몸에 좋은 오골계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몸에 좋은 오골계를 잡아 대접했어야 했는데 못 먹고 못 살던 그 시절엔 마음까지 가난했었는지, 말 그대로 검은 닭을 대접해드렸다.

 

아마도 족히 40년 가까이 된 이야기이다. 예나 지금이나 난 사북에 살고 있다. 40년 전 사북은 광산이 번성하던 때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석탄 가루로 까만 곳이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끗하게 씻겨 내보내도 저녁이면 콧구멍까지 새카맣게 돼 돌아오곤 했다. 검은 강물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던 아이들은 미술 시간에도 강물을 까맣게 그리곤 했다. 그렇게 검은 땅 위에 검은 강이 흐르는 탄광촌에서 난 살고 있었다.

 

아마도 농어촌 체험이라는 주교회의 결정이 없었다면 내 평생 추기경님을 직접 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건 주교회의 결정으로 사북성당은 초비상이 되었다. 신부님도 어려운데 거기에 주교님과 추기경님이라니. 하늘 같은 분들이라 정말이지 잘 대접하고 싶었다. 하여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농촌이니 보리밥을 해드리자고 합의를 보았다.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우리에겐 최선이었다. 그러다 양계장을 하는 자매님이 닭 10마리를 기꺼이 낸다고 했다. 그제야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는 느낌이라 정성을 다해 닭을 삶기로 마음을 모았다.

 

디데이. 추기경님과 주교님이 광산 체험을 하시는 동안 우리는 닭을 잡고 삶았다. 가마솥에 닭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고서야 물을 너무 많이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닭을 삶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을 떠내자, 그냥 삶자 논쟁이 오고 갔지만 닭죽이라도 해 먹을 생각에 그냥 두었다. 얼마나 삶았을까. 제법 고소한 냄새가 날 즈음 추기경님이 체험을 끝내고 오셨다.

 

주방이 분주해졌다. 내 마음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하얀 플라스틱 그릇을 꺼내 연기를 내며 닭을 삶고 있는 가마솥으로 다가갔다. 닭을 담는 순간 알았다. 검은 솥은 자주 쓰지 않으면 검은 물이 나온다는 걸. 잘 삶겨 허연 닭에 검은 물이 배어 둥둥 떠 있었다. 이런, 하느님 맙소사.

 

밥상은 이미 다 차려졌고, 추기경님과 주교님은 기다리고 계시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난 어쩔 수 없이 닭을 담았다. 하얀 플라스틱 그릇에 담으니 검은 국물의 검은 닭이 어찌나 더 검게 보이는지. 추기경님과 주교님께 대접하는 내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추기경님과 주교님들은 광산에 다녀오신 후라 시장하셨는지 아니면 우리들의 정성을 보아서 억지로 드셨는지 하얀 플라스틱 그릇 바닥이 드러나도록 검은 닭 국물을 다 드셨다. 그런 모습을 보고 간신히 용기를 내 말씀드렸다.

 

“죄송해요. 추기경님. 잘하려고 했는데….” “아니어요. 아주 맛있었어요. 고생하셨어요.” 추기경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추기경님을 보내 드리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난 그 검은 닭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검은 탄광 물을 떠 대접한 것 같아서 두고두고 미안했다. 아마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검은 닭 따위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정성이 부족하네, 마네, 내 멋대로 품평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검은 닭을 맛있게 드시던 그분의 우직한 바보스러움이 우리의 실수에 대한 자비이며 사랑이라는 걸.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따뜻한 사랑과 큰 가르침, 우리 삶에 살아 있습니다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당시 시신을 염했던 김진영씨가 서울 명동대성당 앞에 걸려 있는 김 추기경 10주기 기념 현수막을 잡으며 미소 짓고 있다.

 

김 추기경 시신 염했던 김진영씨 … 소외된 이들 우선했던 모습 본받아

 

“김수환 추기경님 손은 부드럽고 온기가 남아 있었어요.”

 

10년 전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을 염했던 김진영(다니엘, 71, 서울대교구 명동본당)씨는 “아직도 느낌이 생생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월 29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만난 김씨는 “김 추기경님은 돌아가신 분 같지 않게 손발이 부드럽고, 표정도 온화하셨다”고 추억했다.

 

본당 연령회원으로 20년 넘게 활동한 김씨지만 당시 기억은 특별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몇십 년 동안 100명이 넘는 사제와 신자들을 염해봤지만, 손에서 온기가 느껴진 것은 드문 일이어서 염하고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명동본당에서 신앙생활하며 김 추기경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 속에 김 추기경은 “모두에게 밥이 돼 주신 분으로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추기경께선 만나는 사람 모두와 악수해주시고, 가는 길이 바쁘더라도 억울한 이의 사연은 꼭 들어주시고, 몸 가눌 힘조차 없을 때도 애써 웃어주셨다”고 떠올렸다. 이어 “추기경님은 보잘것없는 이의 청을 절대 뿌리치신 일이 없었다”며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사신 분”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작고 가난한 본당을 찾아가 연도 교육을 하고 자료도 무료로 나눈다. 또 다리가 불편한데도 한 달에 한 번 시각장애인을 위한 등산 동행 봉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어르신들의 말벗이 돼준다. 김씨는 “김 추기경께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셨다”며 “그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고 싶다”고 소망했다.

 

백슬기 기자 jdarc@cpbc.co.kr

 


 

 

 

신림동 달동네에서 김 추기경 만난 김석용씨 … 매일 묵주기도 5단 바쳐

 

“추기경님, 의사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김석용(고르넬리오, 74, 서울 삼성산본당)씨는 1982년 서울 신림10동 사랑의 집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매달렸다. 김 추기경은 한 달에 두 번 밤골B지구라 불리던 신림동 달동네를 찾았다. 사랑의 집에서 새벽 미사를 집전하고, 동네 곳곳을 누비며 가난한 이웃의 삶을 살폈다. 달동네 주민들은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외국인 신부들이 나눠주는 밀가루와 쌀, 연탄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질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사랑의 집에서 봉사하던 김씨는 김 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추기경님, 끼니를 거르는 분들도 있지만, 돈이 없어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주민들이 많습니다. 의사 선생님 좀 보내주세요”라고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신림동 달동네를 찾았다. 김 추기경의 말 한마디에 달려온 의사들이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아픈 주민들의 증상을 살폈다. 김 추기경은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김씨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벽 미사에서 만난 김 추기경의 표정과 향기를 기억한다. 김 추기경은 늘 신자들에게 봉사와 나눔,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했다. “추기경님께선 이웃들이 슬플 때 함께 울고, 기쁠 때는 같이 웃어주는 신앙인이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늘 그분만 떠올리면 뭉클하고 감사한 일뿐이네요.”

 

김씨는 김 추기경을 닮고 싶어 본당과 이웃을 위한 일이라면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선다. 오랜 기간 사목회장과 성전건립위원장으로 재능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김씨가 십 년 넘게 매일 실천하는 일이 있다. 김 추기경을 위해 묵주기도 5단을 바치는 것. 기도지향은 한결같다. “하느님, 성모님. 김수환 추기경을 성인품에 꼭 올려주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전은지 기자

 


 

 

 

김 추기경 각막 적출·이식 집도한 주천기 교수 … 봉사의 삶 살게 돼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걸 내어줬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으로 새 빛을 보게 된 이는 2명. 김 추기경의 각막을 적출하고 이식을 집도한 이가 주천기(요셉, 서울성모병원 안과) 교수다. 그는 자신의 손끝으로 김 추기경의 각막을 적출했던 당시 상황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김 추기경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붓글씨를 남기고, 각막을 기증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각막 기증은 사후 이뤄지기에 많은 이가 기증을 희망해도 실제 이식까지 이어지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김 추기경의 나눔은 우리 사회의 기증 문화를 변화시켰다.

 

가히 안과 분야의 최고라고 불리는 주 교수도 김 추기경의 수술 집도는 큰 부담이었다. 그는 눈을 기증해야 하니 잘 관리해 달라던 김 추기경의 부탁을 되뇌며, 세간에서 쏟아지던 관심을 이겨내고 수술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김 추기경과의 특별한 인연은 주 교수의 인생을 바꾼다. 김 추기경이 선종한 그 해, 그는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안과 의사로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남을 돕는 데 쓰고 싶어서였다. 봉사의 삶을 나중으로 미룰 수 없었다. 주 교수는 아이티, 인도, 중국, 베트남 등 의료 취약 지역을 찾아 나섰고, 도움이 필요한 지구촌 이웃의 눈을 치료하고 빛을 선물했다.

 

“김 추기경님을 만나기 전에는 결과에만 집중하며 살았어요. 연구 실적이나 업무 성과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했죠. 그러나 삶의 마지막까지 나눔을 실천한 김 추기경님을 보면서 나눔은 삶 그 자체여야지 나중으로 미룰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은퇴를 앞둔 주 교수는 남을 돕는 일에 더욱 매진하고 싶다고 했다. “남을 도우며 느끼는 보람은 일하며 얻는 성취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줍니다. 앞으로 그 기쁨을 더 깊고 진하게 느끼며 살고 싶습니다.”

 

전은지 기자

 


 

 

 

김 추기경 관 운구한 임창재 신부 … 힘들 때 추기경 떠올리며 다시 다짐

 

“내일 울려고 나흘을 참았다. 가장 막내인 새 신부가 내일 당신 가까이에서 함께 걷게 됨을…. 감히 당신을 닮으며 살아 보겠노라고 약속하는 것. 추기경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김수환 추기경의 관을 운구한 임창재 신부의 추모글, 2009년 2월 19일)

 

2008년 6월 사제품을 받은 임창재(대만 해외선교)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후, 새 사제로서 동기들과 함께 문상객을 맞이하고, 관을 운구했다. 임 신부는 애써 쏟아지는 눈물을 삼켰다.

 

임 신부는 김 추기경의 미소가 지금도 눈앞에 그려진다고 했다. “휠체어에 앉아 계시던 김 추기경님께서 저와 동기들에게 서품 준비를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었죠. 추기경님 말씀에 목청껏 대답했는데, 어느새 10살짜리 신부가 됐네요.”

 

임 신부는 혜화동 신학교 목자의 길을 거닐던 김 추기경의 뒷모습이 늘 크게만 느껴졌다. 묵주를 들고 한 걸음씩 앞서가던 김 추기경을 더 자주 찾아뵐 걸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제 수품 후, 임 신부는 입원해 있던 김 추기경을 찾았다. “추기경님께 새 사제로서 안수를 드렸었는데, 기운 없이 누워계시던 추기경님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때가 마지막이었죠.”

 

임 신부는 하늘로 떠나는 김 추기경을 가장 가까이서 배웅했다. 명동대성당에서 용인 성직자 묘까지. 밤새 내린 하얀 눈길 위에서 그분을 닮은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현재 임 신부는 대만 타이중 지역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다. 임 신부는 힘들 때면 기억 속의 김 추기경을 떠올린다.  “추기경님을 모셨던 막내 신부를 하늘에서 어떤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계실까요. 따뜻한 그분의 미소가 무척 그립습니다.”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셨던 분

신치구(베르나르도) 전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장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김수환 추기경의 말년을 지킨 세 사람이 있다. 신치구(베르나르도, 87) 전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장과 김 추기경의 조카사위인 김호권(도미니코)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고 전숭규(의정부교구) 신부다.

 

 

김 추기경 생전, 매주 화ㆍ수요일이면 한 번씩 어김없이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던 신치구 소장은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해선 모든 게 다 공개돼 더 언론에 나갈 게 없다”면서도 “단 한 가지 공개되지 않은 게 있다면, 그분은 평생 부정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분”이라고 전했다. 그는 “현재 교회의 미사 참여율이 낮고 고해성사도 많이 안 봐 큰일 났다고 말씀드리면 ‘그래요?’ 하시며 교회는 그보다 더 훨씬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던 적도 있다고만 말씀하실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선종 전 2년 동안 주교관과 병원을 오가다가 나중엔 걷지도 못하게 돼 휠체어를 타야만 했다. 당시를 신 소장은 “우리 같으면 ‘인생이 끝났어’라고 말할 만도 한데 일체 그런 말씀이 없으셨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추기경은 한 번도 남에 대해, 사제나 평신도들에 대해서도 저 사람 안 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며 “세상 모든 일을, 특히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셨던 분”으로 기억했다.

 

그러면서도 신 소장은 “병상의 추기경께서는 외로우신 듯했다”며 “병문안을 가면 뭐, 재미난 얘기 없어요? 하고 보채듯 말씀하시던 게 꼭 부모님들이 자식들 오면 무슨 얘기든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했다”고 전했다.

 

신 소장은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를 시작으로 18권의 「김수환 추기경 전집」, 35권의 김 추기경 「말씀집」을 출간했다.

 

그는 “김 추기경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겸손하셨고 부지런하셨던 분”이라며 “김 추기경과의 인연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추기경 어록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집 18권에 담긴 추기경님의 신앙과 삶은 그분의 사목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한 마디에 다 담겨 있다”며 “그 바탕에는 정의와 사랑이 있고, 둘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게 기억난다”고 덧붙였다.

 

신 소장은 “김 추기경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법을 잘 지키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훨씬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그는 “그 말씀에는 ‘언제 식사나 한번 하자’는 말조차 지킬 의지가 없을 때는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나아가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도 담겼다”고 술회했다.

 

그는 “김 추기경이 떠나신 지 10년인데,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 달라”며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것 같이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김 추기경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김수환 추기경 사연 공모전 수상작]

따뜻하고 겸손하신 추기경님을 기억하며

이승준 신부(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 부국장)

가톨릭평화신문 2019.02.17 발행 [1502호]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제 인생에 큰 울림을 주신 추기경님과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1996년 여름, 갓 신학교에 입학하고 맞이한 첫 방학. 본당 여름 신앙학교로 도보 성지순례가 기획되어 있었고, 회의 중에 마지막 날 저녁 도보순례 기간 중 찍은 영상과 함께 유명하신 분의 격려 말씀을 담아 같이 보여주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름이 올라왔고 저는 집에 캠코더가 있다는 이유로 주일학교 교사 한 명과 함께 그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무슨 패기였는지 저희는 무턱대고 명동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히 주교관으로 가서 제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히고 추기경님을 뵈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잠시 후 외국 출장이 있으시지만 시간을 내서 저희를 만나주시겠다고 전해주셨습니다. 얼마를 기다리고 직접 뵌 추기경님께서는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저희를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도보 성지순례에 함께하는 학생들과 준비하는 이들에 대한 격려, 그리고 저희들의 질문에 너무도 정성을 다해 답해주셨습니다. 그처럼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시고 나서는 추기경 문장이 새겨진 묵주까지 꼭 쥐어서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제로 살면서 보니 그때 했던 일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단지 신학생이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 찾아왔다고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면 저는 과연 응해줬을까요? 아마 직원에게 적당히 돌려보내라고 했을 겁니다. 추기경님께서 제게 직접 보여주신 이 모습은 그 어떤 겸손과 공감의 가르침보다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고 이해하기보다 사무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결정이라는 이유로 연민과 이해를 쉽게 포기하려 했던 저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때 찍은 영상이 없어졌지만 추기경님께서 주신 작은 묵주,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따뜻함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구석에 놓아두어서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지만 다시 털어 바라보니 귀한 보물이었던 추기경님과의 추억.

 

추기경님의 그 마음을 그대로 살아가지는 못하더라도 그때 제게 보여주신 그 사랑과 겸손하심을 마음 한편에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힘쓰겠습니다.

 

추기경님, 아름다운 추억에 동행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때 보여주신 따뜻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바라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