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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베트남의 순교자들 / 모진 박해의 희생자들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2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베트남의 순교자들 / 모진 박해의 희생자들(1745-1862년)

송영웅(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베트남의 성 안드레아 둥락(Andreas Dung-Lac) 사제와 동료 순교자

 

베트남 천주교회 역사는 1533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도착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리스도교 정신에 반대하는 왕실 법령이 발효되면서 1615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1615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트남 중부지역에 항구한 선교기반을 마련하면서 서서히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627년 예수회의 알렉산드르 드 로드(Alexander de Rhodes, 1591-1660) 신부가 북부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 약 6,700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1630년 베트남에서 추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로드 신부는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왔지만 1645년 베트남에서 재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가 세워지는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전교회에서 교육받은 사제들이 곧바로 베트남에 도착하면서 베트남의 천주교 신앙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1798년부터 1853년 사이에 베트남에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면서 내전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64명의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900년 교황 레오 8세는 이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1833년 왕실은 모든 천주교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명령하였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발로 밟고 지나가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약 30만 명의 신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행된 박해로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1847년 프랑스 전함들이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베트남에 정박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사실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비극의 시작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1862년과 1874년 그리고 1884년 3차례에 걸쳐 베트남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베트남 왕국의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1883년까지 여러 지방에서 계속되었다.

 

주교와 사제들은 모두 유럽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전부 붙잡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1841년 프랑스 정부가 전함들을 보내 개입하겠다고 위협하여 박해의 기세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1848년 새로운 황제가 선교사들의 목을 베어 오는 사람들에게는 두둑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포하여 2명의 사제 아우구스티노 쇠플러(Augustin Schoffler)와 요한 루이스 보나르(John Louis Bonnard)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55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가혹하게 시작되면서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대거 순교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천에 달하는 베트남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되었고 4명의 주교와 28명의 도미니코 수도회원들이 순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7년부터 1862년 사이에 115명의 베트남 출신 사제들과 100명의 베트남 출신 수녀들 그리고 5천 명가량의 베트남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학교가 파괴되었고 약 4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토지와 재산을 빼앗기고 자기 고장에서 추방당하였다.

이 시기의 순교자들 가운데 28위가 1909년 복자품에 올랐다.

 

1862년 프랑스 식민지 군대가 사이공과 여타 지방들을 점령하자 베트남 정부가 항복하면서 체결된 조약에 의하여 베트남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오랜 박해도 마침내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안남 또는 통킹(Tongkin)의 순교자들이라고도 불리는 96위의 베트남 순교자들과 11위의 스페인 선교사들 그리고 10위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 널리 알려진 분들을 몇 달 동안 소개하려고 한다.

 


 

 

Martiri del Vietnam (+1745-1862)

- Andrea Dung-Lac, presbitero

- Tommaso Thien e Emanuele Phung, laici  

- Girolamo Hermosilla, Valentino Berrio Ochoa, O.P. e altri 6 Vescovi

- Teofano Venard, presbitero M.E.P. e 105 Compagni, martiri

Piazza San Pietro, 19 giugno 1988

 

베트남의 순교자들

 

안드레아 둥락 안 짠(Andreas Dung-Lac An Tran, 1785년경-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철저히 신앙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베트남에 활동하던 천주교 선교회에서 선교 사제로 일하던 도중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박해가 베트남 신자들에게 내려졌을 때 체포되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와 관련된 사제들은 박해의 특별한 표적이 되어 다른 신자들보다 더욱 혹심하게 고문당하였다.

그는 후에 성인이 된 베드로 티(Peter Thi)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그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며, 그들은 감옥에서 심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으면서도 고통을 서로 나누며 위로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후에 시성된 테오판네 베나르(Theophane Venard) 신부, 토마스 티엔 짠(Thomas Thien Tran), 임마누엘 풍반 레(Emmanuel Phung Van Le), 예로니모 예르모실라(Hieronymous Hermosila) 주교, 발렌티노 베리오초아(Valentinus Berriochoa) 주교, 그리고 그 밖에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839년 12월 21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안드레아 통 킴 응우옌(Andreas Thong Kim Nguyen, 1790년경-1855)

성인은 1790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성장하면서 성실하게 일하여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고 나중에는 인근 마을을 어우르는 큰 지역의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평소 지녀온 독실한 신앙심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고향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리고 당시 추방되었거나 체포된 다른 신자들과 함께 미토(Mi-Tho)라는 곳으로 강제 송환되어 가던 도중 기진(氣盡)한데다가 심한 탈수현상을 일으켜 죽었다.

 

안드레아 쫑 반 짬(Andreas Trong Van Tram, 1817-1835)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가정에서 좋은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으며 장래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되자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당시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본당 사목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834년 베트남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군인 계급장을 박탈당하고 후에(Hue)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다음 해 그는 관리들로부터 신앙을 버리도록 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동료들과 순교 대열에 동참하였다.

아들의 순교를 지켜보기 위하여 후에로 왔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참수당할 때 형집행장 안으로 들어가 잘린 목을 자신의 치마폭에 받았다.

 

안토니오 꾸인(남)(Anthonius Quynh (Nam), 1768-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68년에 태어났으며,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는 신자가 되어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838년 유럽 선교사들과 접촉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동료 수감자들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으며 많은 고통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감내하다가 1840년 감옥에서 교살(絞殺)당하였다.

 

안토니오 딕 응우옌(Anthonius Dich Nguyen, ?-1838)

성인은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던 부농(富農)이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파리 외방전교회를 적극 도와주었고 교회를 위해 많은 재산을 관대하게 희사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는 관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려는 많은 사제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는데 그중에는 야고보 남(James Nam) 신부도 있었다.

관헌들에게 이러한 활동을 발각당하여 체포된 그는 심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다가 1838년 참수 치명하였다.

 

아우구스티노 후이 베트 판(Augustinus Huy Viet Phan, 1795-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한때 군인으로 근무하였으며 천주교 신자가 되어 동료 군인이던 니콜라오 테(Nicholas The)와 함께 교회의 선교 활동을 도와주었다.

1839년 이 두 사람은 모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형틀에 사지를 묶인 채로 톱질을 당하여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아우구스티노 모이 반 응우옌(Augustinus Moi Van Nguyen, 1806-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날품팔이꾼이었다.

신앙에 대하여 배운 다음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 되어 뛰어난 신앙심과 자비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렬해지고 있을 때 체포되었다.

관리들로부터 신앙을 버리겠다는 표시로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도록 명을 받은 그는 이를 거부하고 나서 교살되었다.

 

오귀스탱 쇠플러(Augustin Schoffler, 1822-1851)

성인은 프랑스 사람으로 1822년 로렌(Lorraine)의 미텔브론(Mittelbronn)에서 태어났으며 사제가 되고자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 훈련을 받은 그는 1848년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한 때였기에 얼마 뒤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1851년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베르나르도 두에 반 보(Bernardus Due Van Vo, 1755-1838)

성인은 1755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개종하였다.

그는 신자가 된 후에 사제가 되고자 신학을 공부하였고 사제로 서품된 후 베트남의 복음화를 위하여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선교 활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성인은 1838년 8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도미니코(니콜라오) 닷 딘(Dominicus (Nicholas) Dat Dinh, 1803-1839)

성인은 군인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앙을 거부하라는 압력을 거부하자 군대에서 추방되었고 1839년 교살 당하였다.

 

도미니코 에나레스(Dominicus Henares, 1765-1838)

성인은 스페인 출신으로, 당시 베트남에서 대목구장인 이냐시오 델가도(Ignatius Delgado) 주교의 보좌주교로서 그를 도왔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도미니코 주교는 교리교사 성 프란치스코 찌에우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참수형을 받았다.

도미니코 성인은 형장에서 하느님을 찬송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훌륭하게 선포하였다.

 

도미니코 짝(도아이)(Dominicus Trach (Doai), 1792-1842)

성인은 1792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신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후에 사제가 된 후에는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신하였다.

1842년 체포되어 베트남 사람이 휘두르는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도미니코 위 반 부이(Dominicus Uy Van Bui, 1813-1839)

성인은 1813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지역 공동체에서 교리교사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매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을 때 체포되었다.

관헌들이 그에게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1839년 교살되었으며,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도미니코 한 반 응우옌(Dominicus Hanh Van Nguyen, 1772-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된 그는 베트남의 복음화를 위하여 수십 년 동안 헌신하였다.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해질 무렵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도미니코 쑤옌 반 응우옌(Dominicus Xuyen Van Nguyen, 1787-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자기 나라 백성의 신앙심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무렵 성 토마스 두(Thomas Du)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두 사람 모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엠마누엘 찌에우 반 응우옌(Emmanuel Trieu Van Nguyen, 1756-1798)

성인 175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군인이 되었다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가 되기 위하여 프랑스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사제로 서품된 다음 베트남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체포당하였다.

그는 감옥으로 이송되어 온갖 형벌을 받은 다음 정부 관리들에 의하여 참수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짠 응우옌(Franciscus Xavier Can Nguyen, 1803-1837)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03년 소우 미엥(Sou Mieng)에서 태어나 교리교사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그 지역에서 펼치던 선교 활동을 도와주다가 관헌에 체포되었다.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거부하자 교살 당하였다.

 

프란치스코 찌에우 반 도(Franciscus Chieu Van Do, 1796-1838)

성인은 중국 사람으로 1796년에 태어났다. 천주교 신자가 된 뒤에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사제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베트남에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자신이 모시고 있던 성 도미니코 에나레스 주교와 함께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1838년 이 두 사람은 모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 길 데 프레데리치(Franciscus Gil de Frederich, 1702-1745)

성인은 스페인 사람으로 1702년 스페인의 토르토사(Tortosa)에서 출생하였다.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선교 사제로 훈련을 받은 뒤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732년 그는 필리핀에서 베트남으로 선교지를 옮겨 1742(또는 1743) 체포되기 전까지 선교 사제로 온 힘을 다해 활동하였으며 체포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랑수아 이지도르 가즐랭(Francois Isidore Gagelin, 1799-1833)

성인은 1799년 프랑스의 몽페로(Montperreux)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22년 베트남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베트남 정부가 교회에 대한 박해를 다시 시작하였을 때 그는 봉손(Bong-son)에서 관헌들에게 자신이 사제임을 당당하게 밝히며 자수하였다.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그는 1833년 감옥에서 교살(絞殺)되었다.

 

프랑수아 자카르(Francois Jaccard, 1799-1838)

성인은 1799년 프랑스 사부아(Savoy)의 오니온(Onion)에서 태어났다.

자카르 성인은 청년 시절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사제로 서품되었고 1826년 베트남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선교 사제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중 1838년 관헌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도 신앙을 꿋꿋이 증거하다가 1838년 교살(絞殺)되었다.

 

프란치스코 쭝 본 쩐(Franciscus Trung Von Tran, 1825-185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25년 판싸(Phan-xa)에서 태어났다.

어려움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을 지켜나갔던 그는 군대에서 상등병을 근무하다가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그 부대의 대장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종용하였지만 성인은 이를 거부하였고, 1858년 안호아(An-hoa)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히야친토 카스테네다(Hyacinthus Casteneda, 1743-1773)

성인은 스페인 세타보(Setavo)에서 태어났다.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로 서품된 후 첫 선교임지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선교 사제로 활동하다가 다시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선교 활동을 하던 중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1773년 빈첸시오 리엠(Vincentius Liem) 신부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델가도 이 세브리안(Ignatius Delgado y Cebrian, 1761-1838)

성인은 1761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고 늘 기도하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장성한 뒤에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가 되었다.

그리고 참 신앙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열의에 불타 베트남으로 갔다.

그곳에서 성인은 약 50년 동안 선교 사제로서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강론과 유능한 교회행정으로 이름을 날려 베트남 동부지역을 관장하는 대목구 주교가 되어 주교로 서품되었다.

베트남에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정부 관리들은 성인을 체포하여 쇠창살로 만든 우리에 가두어 놓고 뭇사람들의 조롱을 받게 하였다.

성인은 음식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뜨거운 태양 아래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아사(餓死)하였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는 이냐시오 델가도 성인을 시복하였다.

 

야고보 남(Jacobus Nam, 1781-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사제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가입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베트남에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을 때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야고보 남 성인은 1838년 안토니오 딕(Anthonius Dich) 그리고 미카엘 미(Michael My)와 함께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베트남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잔혹한 박해가 일어나 암울했던 시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예로니모 예르모실라(Hieronymus Hermosila, 1780-1861)

성인은 그처럼 어려웠던 한 시기에 베트남 교회를 이끈 중요한 지도자였다.

성인은 스페인의 라 칼파다(La Calfada)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사가 되었다.

그 후 필리핀 마닐라(Manil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로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곳에서 1828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후 베트남의 동부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도미니코 수도회를 돕기 위하여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성인은 박해가 일어나던 초기에 순교한 이냐시오 델가도 주교의 뒤를 이어 대목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중요한 직위에 있었기에 주교로 서품받자마자 곧 베트남 관헌들이 체포할 제일 우선순위의 인물이 되었다.

관헌들에게 체포된 후 감옥에 갇혀 참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1861년 발렌티노 베리오초아(Valentinus Berriochoa) 주교와 함께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요한 닷(Joannes Dat, 1764-179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64년에 태어났다. 장성하여 신학교육을 받고 179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복음을 전하던 중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1798년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장 루이즈 보나르(Joannes Louis Bonnard, 1824-1852)

성인은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어 전심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한 사도직 활동을 펴나갔다.

성인은 선교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베트남 관헌들의 눈에 드러나 체포되었으며 185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요한 밥티스트 꼰(Joannes Bapistae Con, 1805-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05년에 태어났다. 성인은 온 마음을 다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준행하였다.

결혼한 후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평신도 교리교사로서 교회에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하게 자행되던 무렵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40년 참수형을 받고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장 샤를 코르네(Jean Charles Cornay, 1809-1837)

성인은 1809년 프랑스의 루동(Loudun)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선교회에서 사제로 서품 받은 다음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성인은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로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끌려나와 모진 매를 맞고 1837년 9월 20일 참수형을 받았다.

 

요한 호안 찐 도안(Joannes Hoan Trinh Doan, 1789-1861)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89년 베트남의 킴롱(Kim-long)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고 깊은 신앙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확신하는 신앙을 자기 민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베트남 임금 뜨 득(Tu-Duc)이 보낸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처형되었다.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요한 타인 반 딘(Joannes Thanh Van Dinh, 1796-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교리교사로 활동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을 도와주었다.

성인은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요셉 까인 루앙 호앙(Joseph Canh Luang Hoang, 1765-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65년에 태어났다.

성인은 의술을 공부하여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뛰어난 신앙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기에 박해시기에 정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1838년 참수형을 받았다.

 

요셉 페르난데즈(Ioseph Fernandez, 1775-1838)

성인은 1775년 스페인에서 출생하여 청년 시절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805년 베트남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신학교육을 마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인은 사제가 되면서 선교에 전적으로 투신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그 후 도미니코 수도회 베트남 관구장 대리(Provincial vicar)가 되었는데 그러자마자 안타깝게도 관헌들의 주목대상이 되어 바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장렬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요셉 히엔 꽝 도(Ioseph Hien Quang Do, 1775-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였고 특히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로서 선교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러한 행적들이 현저하여 1840년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는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체포된 그해에 남딘(Nam-Dinh)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캉 두이 응우옌(Ioseph Khang Duy Nguyen, 1832-1861)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예로니모 예르모실라 주교의 복사로서 주교를 성심성의껏 모셨다.

1861년 주교가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성인은 주교를 비밀리에 탈출시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발각되어 자신도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온갖 고문을 다 받은 다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루 반 응우옌(Ioseph Luu Van Nguyen, 1790-1854)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90년에 태어났다.

요셉 성인은 열심한 신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자기 나라에서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채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다가 1854년 빈롱(Vinh-long)에서 옥사하였다.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nd, 1803-1835)

성인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로, 프랑스의 파사방(Passavant)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간 후 베트남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선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1835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마지막에는 집게로 살을 찢는 고문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를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셉 비엔 딘 당(Ioseph Vien Dinh Dang, 1786-1838)

성인은 178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 후 사제가 되어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에 적극 투신하였다.

성인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응이(킴)(Ioseph Nghi (Kim), 1771-1840)

성인은 베트남 출신의 사제로, 파리 외방 전교회에 가입하여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에 적극 투신하였다.

박해가 심해지던 무렵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1840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티 당 레(Ioseph Thi Dang Le, 1825-186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그 당시 베트남 임금이던 뜨 득(Tu-Duc)을 가까이서 모시던 근위병이었다.

독실한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으며,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하자 끝까지 이를 거부하다가 1860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우옌 딘 응우옌(Ioseph Uyen Dinh Nguyen, 1778-1838)

성인은 1778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베트남교회가 펼치던 선교 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활동하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성인은 1838년 옥중에서 모진 모욕과 천대를 받고 심한 고문을 다하여 순교하였다.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Laurentius Huong Van Nguyen, 1802?-1856)

성인은 1802년경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교회를 위하여 다가오는 온갖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사제로서 수십 년을 성실하게 사목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1856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루카 로안 바 부(Lucas Loan Ba Vu, 1756-1840)

성인은 175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를 깨닫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훌륭한 사제로 표양을 보이면서 살았기에 사람들이 존경하는 원로사제가 되었다.

박해시기에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1840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르티노 토(Martinus Tho, 1787-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직업은 세금 징수원이었지만 신심이 매우 돈독하였다.

박해시기에 체포된 그는 신앙을 버리도록 관헌들에게 강요당하자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문을 받다가 1840년 원로사제인 마르티노 띤 죽 따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르티노 띤 죽 따(Martinus Thinh Duc Ta, 1760-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사제가 되어 복음 전파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었다.

수십 년 동안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1840년 80세의 나이로 마르티노 토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태오 감 반 레(Matthew Gam Van Le, 1812-1847)

성인은 1812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에 가입하여 자기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파리 외방전교회를 돕는 일에 적극 투신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어선(漁船)을 이용하여 싱가포르에서 베트남으로 선교 사제를 모셔오는 일을 맡아 하였다.

1846년 그런 일을 한 이유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태오 알론소 레지니아나(Matthew Alonso Leziniana, 1702-1745)

성인은 스페인의 나바스 델 레이(Navas Del Rey)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거기서 다시 신학공부를 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필리핀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던 도미니코 수도회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었다.  그 후 그는 베트남으로 선교지를 바꾸어 베트남의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던 중 체포되어 1745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태오 닥 (프엉) 응우옌(Matthaeus Dac (Phuong) Nguyen, 1801-1861)

성인은 1801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오랫동안 교리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다가 박해시기에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1861년 동하이(Dong-Hai) 인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미카엘 하이딘 호(Michael HyDinh-Ho, 1808-1857)

성인은 1808년경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베트남 귀족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족들과 함께 자라면서 왕립행정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베트남의 비단 제조업을 총괄하는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부(富)와 막강한 권한을 행사는 위치에 올랐다.

미카엘 하이딘 호 성인은 처음에는 교회가 받던 박해와 별로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깊이 관여하였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일로 체포되어 후에(Hue) 인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미카엘 미 후이 응우옌(Michael My Huy Nguyen, 1804-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안토니오 딕(Anthonius Dich) 성인의 장인이다.

성인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농부였으며, 신앙심이 돈독하여 교회를 돕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고 박해시기에 사위 안토니오 딕 성인이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자 이를 측면에서 잘 도와주었다.

1838년 야고보 남(Jacobus Nam) 신부를 숨겨주려다가 안토니오 성인은 물론이고 신부와 함께 미카엘 성인도 체포되어 세 분 모두 순교하였다.

 

니콜라오 테(둑 부이)(Nicolaus The(Duc Bui), 1792-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큰 지역의 행정 책임자를 호위하는 군인이었다.

신앙심이 돈독한 그는 박해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일에 추호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관헌들로부터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말도 못할 고문을 받았다.

그러한 형벌에도 그가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자 형리들은 그를 산 채로 톱질하여 몸을 두 동강 내 죽였다.

 

바오로 똥 부옹(Paulus Tong Buong, ?-1833)

성인은 베트남 민 망(Minh Mang) 황제의 근위경비대 고위 장교였다.

성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자기 나라에서 복음 전하를 위해 활동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를 적극 도와주었다.

그의 이런 활동이 적발되면서 1832년 마침내 체포되어 계급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여러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33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한(Paulus Hanh, 1826-1859)

성인은 베트남 순교자 중에서 특별히 유별난 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분은 무뢰배였지만 남몰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도와주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이 발각되어 관헌들에게 체포되자 그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공언하였다.

이 때문에 형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이를 견뎌내다가 1859년 사이공(Saigon, 현 호치민 시) 인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코안 칸 팜(Paulus Khoan Khan Pham, 1771-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후원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었다. 사제가 된 후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40년 가까이 사목하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약 2년 동안 온갖 고문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이를 끝까지 잘 감내하였다.

1840년 마침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록 반 레(Paulus Loc Van Le, 1831-1859)

성인은 1831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군인이었다.

성소를 느낀 성인은 군인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였으며, 사제 서품을 받은 얼마 후에 체포되어 1859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띤 바오 레(Paulus Tinh Bao Le, 1793-1857)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복음화에 동참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사제로서 복음 선포를 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 신앙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간내하다가 1857년 손타이(Sontay)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두옹 반 쪼웅(Petrus Duong Van Troung, 1808-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베드로 쭈앗(Petrus Truat, 1816-1838) 성인과 함께 교리교사로 봉사하였다.

그들은 모두 자기 나라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 사제와 본국 사제들을 돕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박해시기에 이 두 사람 모두 체포되어 1838년 순교하였다.

 

베드로 히에우 반 응우옌(Petrus Hieu Van Nguyen, 1783-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리교사로서 선교사들을 도왔다.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관헌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라고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으며, 1840년 동료 신자 두 사람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피에르 프랑수아 네롱(Pierre Francois Neron, 1818-1861)

성인은 1818년 프랑스의 쥐라(Jura)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고 184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된 후 처음 선교사로 파견된 곳을 홍콩이었다.

그리고 홍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트남으로 다시 선교지가 바뀌었다.

성인은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베트남 정부가 재차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을 때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이를 감내하다가 1861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꾸이 꽁 도안(Petrus Quy Cong Doan, 1826-1859)

성인은 베트남의 붕(Bung)에서 태어났으며, 열심한 신자로서 장성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복음화를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었다.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를 끝까지 감내하다가 1859년 차우독(Chaudoc)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티 반 쭈옹(팜)(Petrus Thi Van Truong(Pham), 1763-1839)

성인은 1763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는 사제로서 사목생활에 수십 년을 봉직하다 보니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노사제가 되었다.

76세 되던 해인 1839년 체포되어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뚜안 바 응우옌(Petrus Tuan Ba Nguyen, 1766-1838)

성인은 176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는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사제로서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 속에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신앙을 고수하자 관리들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그동안 형리들에게서 받은 온갖 고문으로 온몸이 많이 상하였기 때문에 1838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베드로 뚜이 레(Petrus Tuy Le, 1773-1833)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장성하여 신학교에 입학한 뒤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신자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는 사제로서 사목하다가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인 1833년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반 반 도안(Petrus Van Van Doan, 1780?-1857)

성인은 1780년경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나라의 복음화를 위하여 한평생을 봉헌하면서 많은 일을 기쁘게 수행하였는데, 그중 성인이 주력한 일은 교리교사였다.

77세가 되던 해인 1857년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관헌들로부터 그리스도를 배반하라고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끝내 거부하면서 신앙에 충실함을 영웅적으로 드러내었다.

1857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필립보 민 반 판(Philippus Minh Van Phan, 1815-1853)

성인은 1815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이 되었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그를 프랑스로 유학 보내어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사제가 된 후 베트남으로 돌아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인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1853년 빈홍(Vinh-hong)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시몬 호아 닥 판(Simon Hoa Dac Phan, 1778-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의사이면서 자기가 사는 읍의 읍장으로 일하였다.

1840년 체포되어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신앙에 충실하였다.

의사이고 읍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혹독하게 고문을 받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스테판 에티엔 테오도르 케노(Stephen (Etienne-Theodore) Cuenot, 1802-1861)

성인은 1802년 프랑스의 보리우(Beaulieu)에서 태어났으며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파견되어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던 중 1833년 베트남 선교지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싱가포르(Singapore)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주교가 된 후 현지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861년 체포되어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1월 14일에 옥사하였는데, 원인은 독액(毒液)에 의한 사망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생을 바친 선교사 주교로 추앙받고 있다.

 

스테파노 빈(Stephanus Vinh, 1814-1839)

성인은 신앙심이 깊은 농부로서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관헌들이 강요하는 배교를 거부하자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닌타이(Ninh-Tai)에서 교살당하였다.

 

프랑스인 사제이자 베트남의 순교자인 테오판 베나르(Theophane Venard, 1829-1861)

성인은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 분으로, 그리고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 분으로 유명하다.

성인은 프랑스의 픽-생루(Pic-St. Loup)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점차 선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성인은 신학교 과정을 마친 후 1852년 6월 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해 9월 15일에 홍콩으로 파견되어 15개월 동안 선교에 전념하였고 그 후 당시 통킹(Tonkin)이라 불리던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성인이 베트남으로 파견될 무렵은 베트남 국왕이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하고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베트남에서 수행한 선교는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테오판 베나르 성인은 낮에는 교우들이 사는 촌락에서 숨어 지내다가 밤이 되면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걸린 심한 역병(疫病)으로 신체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여 더 이상 베트남 신자들을 위해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약 4년 동안 불굴의 의지로 사목활동에 전념하다가 1860년 11월 30일 체포되었다

성인은 관리들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난 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즉시 순교하는 은총을 받지 못하였다.

감옥에 갇혀 심한 모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성인은 이에 대하여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주님의 정원에 핀 꽃에 배유하면서 이렇게 썼다. “저는 주님께서 가꾸시는 정원에서 자라나는 봄꽃과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 정원에서 이 꽃을 꺾으시면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기병대들이 사용하는 날카롭고 가벼운 칼이 제 목을 치면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겠지요.”

 

1861년 2월 2일 심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베트남 관리들은 그를 교수형에 처한 다음 잘린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놓고 베트남 왕국이 천주교와 싸워 이긴 전승기념물처럼 전시하였다.

베트남 신자들은 이분의 유해를 수습하여 프랑스로 보내드렸고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그분의 유해를 파리에 있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성당에 안치하였다. 1909년 5월 2일 복자로 시복되었다.

 

토마스 데 반 응우옌(Thomas De Van Vguyen, 1810-1839)

성인은 베트남의 평신도로서 직업은 재단사(裁斷師)였다.

토마스 성인은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으로 박해시기에 선교 사제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자연스레 눈에 띄어 1839년 체포되었고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충실히 지키다가 교살당하였다.

 

토마스 티엔 짠(Thomas Thien Tran, 혹은 Thomas Dien, 1820-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신학생으로서 사제 수품을 준비하고 있던 중 1838년 체포되었다. 베트남 관리들은 그에게 모진 매질을 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였는데 당시 성인의 나이는 18세였다.

 

토마스 두 비엣 딘(Thomas Du Viet Dinh, 1774-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었다가 그 후 사제로 서품되어 남딩(Nam-Dingh)에서 선교사제로 활동하였다.

1839년 체포되었을 당시 성인의 나이는 65세였다.

성인은 참혹할 정도로 많은 고문을 받은 다음 참수형에 처해져 순교하였다.

 

토마스 토안(Thomas Toan, 1767-1840)

성인은 교리교사로 활동하다가 1840년 체포되었는데 당시 73세의 고령(高齡)이었다.

처음에는 관리들의 무서운 협박이 두려워 배교할 의향을 비쳤지만 곧바로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확고한 신앙심으로 배교를 거부하자 많은 매질을 당하였고 12일 동안 뜨거운 뙤약볕에 그대로 방치되어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노령에다가 심한 고문을 받아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순교하였다.

 

발렌티노 베리오초아(Valentinus Berriochoa, 1827-1861)

성인은 베트남의 주교이자 같은 스페인 출신인 예로니모 에르모실라(Hieronymus Hermosila, 1780-1861) 주교의 동료였다.

두 분은 박해시기를 맞이하여 사목활동이 매우 어려웠던 베트남에서 주교로서 활동하였다.  엘로리아(Elloria)에서 태어난 발렌티노 베리오초아 성인은 성장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모든 수도회원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수도생활에 뛰어난 모범을 보였다.

스페인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사제로 서품된 다음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성인은 뛰어난 수도사제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1858년 발렌티노 성인은 주교로 서품되고 도미니코 수도회가 선교하고 있던 베트남 지역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베트남은 당시 천주교를 몹시 박해하던 시기였으므로 사목활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하고 험난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61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도미니코 수도회원인 예로니모 에르모실라 주교와 함께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두 분은 같은 날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발렌티노 베리오초아 성인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빈첸시오 리엠(Vincentius Liem, 1732-1773)

성인은 베트남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분으로 베트남에서 순교한 최초의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이다. 성인은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자라 장성한 다음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그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딘 후 그는 곧바로 히아친토 카스테네다(Hyacinthus Castaneda, 1743-1773) 주교를 보좌하는 신부로 임명되어 온 정성을 다하여 직무에 충실하였다. 1773년 체포되어 카스테네다 주교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빈첸시오 옌 도(Vincentius Yen Do, 1764-1838)

성인은 180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832년 박해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비밀리에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1838년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88년 6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베트남에서 순교한 분들을 모두 시성하면서 끔찍한 박해시기에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신앙심으로 베트남의 신자들에게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순교자들의 용기와 충직한 신앙심을 상찬(賞讚)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96명의 베트남 순교자들과 11명의 스페인 순교자들 그리고 10명의 프랑스 순교자들을 바티칸에서 시성하면서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눈물로 씨 뿌리던’ 베트남의 순교자들은 베트남 사람들과 그리고 베트남 문화와 참된 의미에서 심오한 대화를 시작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억압 속에서도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고 하느님에 대한 진리와 보편적인 신앙을 선포하면서 전 동양 세계의 종교적 문화에 잘 어울리는 신앙 체계와 신자들이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제안하였습니다.

 

베트남 신자들은 그들의 모국어로 쓰인 첫 번째 교리서를 그 당시에 이미 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서에서 가르치는 것대로 그들은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단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흠숭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협적으로 억누르려고 하자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겸허하게 그러나 용기 있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베트남 국민으로서 국가의 권위에 충실하게 따르기를 원하였고 정당하고 올바른 법질서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지키고 싶다는 자신들의 소망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대대로 지켜온 조상에 대한 효경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져온 부활의 신비라는 빛 안에서 다시 보면서 조상에 대한 효경을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베트남 교회는 순교자들이 보인 모범과 그들이 목숨을 걸고 증언한 것을 토대로 이 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정당한 제도, 관습에 대하여 교회는 이를 배척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제도와 관습 그리고 문화적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구현해 나감으로써 이 나라의 진정한 발전에 충실하게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우리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바로 베트남에 살고 계시는 신자 여러분들을 위한 것으로 이 은총의 샘에서 솟은 물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신앙이 여러분 안에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세대 안에서 계속하여 이어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선조들이 물려준 이 신앙이, 진정한 베트남 사람으로 그리고 조국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려는 시민으로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인내의 큰 토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축일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Andrew Dung-Lac)과 동료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