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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성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에 나타난 독도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성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에 나타난 독도

성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에 나타난 독도

 

 

로마자로 'ousan' -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표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회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명기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고 있다. 조선전도는 서양에 알려진, 한국인이 제작한 첫 한반도 지도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소개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는 1970년대 후반까지 김 신부 자신의 서한과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만으로 전해졌다. 유럽 어디엔가 소장돼 있을 것이란 풍문만 무성했을 뿐 그때까지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한국인은 없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한국인 최초로 찾아낸 주인공은 바로 최석우(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몬시뇰이다.

 

1978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가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최 몬시뇰은 이듬해 무작정 유럽으로 날아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고문서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고문서고를 샅샅이 뒤져도 지도를 찾을 수 없었던 최 몬시뇰은 낙심하다 갑자기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가 유럽학계에 발표됐다면 분명 지리학사전에 소개돼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1879년에 저술된 생 마르탱의 「세계지리사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사전에 그토록 갈망하던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원본이 파리국립도서관 지도부에 소장돼 있다"는 것과 "1855년 그 지도가 프랑스 지리학회지에 소개됐다"는 내용이었다.

 

최 몬시뇰은 그 즉시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가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와 감격적 '상봉'을 했다. 그리고 도서관 지도부의 협조로 필름 촬영을 한 다음 귀국해 관동대 방동인 교수 도움으로 200만분의 1로 축소한 지도를 간행했다.

 

 

▲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김대건 신부는 1845년 4월 7일자로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친필 서한에서 그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고 밝힌다. 당시 부제였던 김 신부는 몰래 귀국해 선교사들의 안전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이 지도를 제작했다.

 

김대건 신부는 지도에 불필요한 산이나 강 이름 등을 빼고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수록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또 우리나라 지명을 우리 발음 그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이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이전에 서양에 알려진 우리나라 지도는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제작한 '조선국도'와 독일인 시볼트가 제작한 '조선반도도'가 전부였다. 당빌의 조선국도는 북경 주재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10여년간 수집한 중국과 조선측의 자료를 근거로 제작해 조선 지명이 모두 중국발음으로 표기돼 있다. 또 시볼트의 조선반도도는 일본원도에 의거해 그린 지도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서양에 우리 지명을 소개한 첫 지도다.

 

1855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지리학사전에는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 대해 "김대건은 분명히 당빌과 시볼트가 사용한 것과는 다른 지도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 그의 지도를 작성했다. 과학적 여건이 명백히 결여돼 있음에도 거기에는 우리가 항상 참고해야 할 많은 정보들이 있다. 그것은 예수회 수사들이 천문학적 원리에 의해 수정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중국인들이 작성한 지방지도와 상이한 것이다. 달레가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한 지도는 김대건지도와 결부시켜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김대건 신부는 한성부서관에 보관돼 있는 공식지도를 참고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야인인 김대건 신부가 어떻게 규장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한성부서관에 있는 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 이에 최석우 몬시뇰은 당시 고관을 지낸 이들이 관에서 만든 지도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컸지만 일반인들도 관부에서 필사돼 유포된 지도들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중국 변문에서 최양업 신부(당시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달됐고, 매스트르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던 프랑스 총영사 몽티니에게 이 지도를 건냈다. 몽티니는 프랑스로 귀국해 이 지도를 왕립도서관에 기증했고 오늘날까지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이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입수한 조선해도를 참고로 리델 주교에 의해 보완됐고, 달레 신부 역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에 교우촌을 첨가하고 프랑스 해군성 지도를 참고해 조선 해안선 일부를 수정해 자신의 조선전도를 제작, 한국천주교회사 저서에 수록했다.

 

 

▲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서 울릉도와 독도 지역을 확대한 장면

 

김대건 조선전도에 표기된 독도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조선전도에 대부분의 산과 강 이름을 삭제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기입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전도에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뚜렸하게 표기했다.(사진 아래 확대한 지도 오른쪽)독도는 조선 후기인 1881년(고종 18년)부터 '독도'로 불렸으며 이전에는 삼봉도(三峰島)ㆍ우산도(于山島)ㆍ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렸다.

 

리델 주교는 1869년 「한중일 지도」를 제작하면서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참고해 독도를 명기했고, 달레 신부 역시 1874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보완해 제작한 자신의 「조선지도」에 독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했다.

 

최석우 몬시뇰은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당시 주로 중국과 일본의 정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지도를 그리던 서양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의 지도로, 서구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또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오늘날 독도영유권문제에 있어 독도의 정확한 위치와 명칭을 서양세계에 알린 최초의 지도이며, 독도가 우리의 고유영토라는 사실이 이미 19세기 중엽에 서양에 널리 알려졌고 일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평화신문, 제980호(2008년 7월 27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