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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김대건, 목을 잃고 하늘을 보다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김대건, 목을 잃고 하늘을 보다

순교로 진리 지키며 자신을 온전히 봉헌

 

 

<사진설명>

 

▲ 서울시 이촌2동에 위치한 새남터 순교성지. 1846년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성 김대건 신부는 10월 16일 26세의 나이에 군문 효수형으로 이곳에서 순교했다.

 

▲ 새남터 순교성지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성인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죽음을 통해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했다.

 

▲ 새남터 순교성지에 보관돼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친필 서한.

  

순교로 진리 지키며 자신을 온전히 봉헌

1845년 상해서 사제품 … 용인서 주로 활동

이듬해 반역죄로 체포돼 10월 새남터서 순교

  

지난해 12월 4일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이사장 한양원)는 ‘우리 민족 5000년을 지켜준 인물 100인’중 한명으로 성 김대건 신부(1822~1846)를 선정했다. 역시 지난해 7월 한국조폐공사는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 9호로 김대건 신부를 선정, 기념 메달을 출시했다. 이밖에 김대건 신부를 소재로 하는 오페라, 음악회, 소설, 연극 등은 헤아리기도 힘들다.

 

왜 우리는 160여 년 전 약관의 나이로 스러져간 이 청년에게 열광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 앞에서 옷깃 여미게 하는가. 103위 시성 25주년의 해를 시작하며 새남터 성지를 찾았다.

 

목을 잃고 하늘을 보다

 

목도리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겨울 칼바람이 목을 친다. 하지만 목에 와 닿는 그 서늘함이 꼭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새남터(서울시 용산구 이촌2동).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목이 박해의 칼날에 ‘툭 툭’ 떨어진 곳이다. 그 애절한 장소에 한국순교복자수도회가 1987년 완공한 3층 기와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이 서 있다.

 

성인의 친필 서간 앞에 섰다. 성인을 생각하면 늘 가장 먼저 15살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1836년 12월 겨울. 신학생으로 선발, 신학교가 있는 마카오로 가기 위해 중국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는 소년은 얼마나 집과 부모 형제들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조선 음식이 먹고 싶었을까. 얼마나 추웠을까.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영성

 

성인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1827년 정해박해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성인은 모방 신부(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토마스)과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마카오로 떠난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그해 10월 12일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다. 이후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성인은 1846년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다음날인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당시 조선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성인에 대해 “영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사형장에서 성인은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했다. 성인은 또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 한다”고도 했다. 자신의 목을 칠 망나니들에게도 “천주교 신자가 되어 나중에 만나자”고 했다. 신념을 위해 자신의 젊은 목숨을 바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 신념이 진리라면 더욱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지 못할 말이다. 참 행복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지 못할 말이다.

 

성인은 사랑에 사로잡혀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했으며,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진리를 말했고,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했다.

  

목을 들어 하늘을 보다

 

새남터 성당의 유명한 103위 순교 성인화 진품 앞에 섰다. 그 중심에 김대건 신부가 두 손 모으고 서 있다. 망나니의 번득이는 칼날 앞에서 느꼈을 법한 공포가 느껴지지 않는다. 천국의 행복이 가득하다. 참 평화스럽다.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목숨을 빼앗는 그런 시절이 아니다. 2009년이다. 이제는 고해성사를 위해 몇날 며칠을 걸어서 사제를 찾아갈 필요도 없다. 행복은 지척에 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칼바람이 어느덧 물러났다. 바람 한 점 없는 포근한 날씨. 움츠러들었던 목을 펴고 하늘을 본다. 성인의 덕(德)에 아직 이르지 못해서일까. 날씨 따라 마음도 이랬다 저랬다 한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요약)

“주께서 하고자 하신 일 아니랴”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께서 아득한 태초로부터 천지 만물을 지어 제 자리에 놓으시고, 그 중에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목적과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이제 우리 조선에 교회 들어온 지 50~60여 년 동안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 지경이 되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들과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을 당하고 보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한 마음이 어찌 없겠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께서 돌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께서 하고자 하신 일 아니면 주님의 상과 주님의 벌 아니랴. 황황한 시절을 당해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서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음 같이 해서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우면서,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편지로써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서 만나자.

 

김대건 신부 배출한 김해김씨

‘천주교 성인공파’ 분리·창립

 

2002년 9월.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인 충청도 솔뫼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김대건 신부를 배출한 김해김씨 안경공파에서 ‘천주교 성인공파’(天主敎 聖人公派)가 창립총회를 갖고 분리돼 나온 것.

 

안경공파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735∼1814) 순교자를 제1대 파조(派祖)로 하여 그의 네 아들과 그 후손들을 ‘천주교 성인공파’로 분파한다고 밝혔다.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는 가계에서 천주교 집안이 독립된 파로 갈라져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며 성인공파의 파조인 김진후(비오, 1735∼1814) 순교자의 8∼11대 후손이 한 자리에 모여 선조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성인공파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순교자 12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이들은 김대건 신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살다보니 친척끼리의 왕래도 없었고 나중에는 서로 남남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을 신앙의 힘으로 버티어내고 200년이 지나 성인공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신앙명가(信仰名家)로 거듭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월 25일,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