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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영원한 생명을 설파하고 택한 김대건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영원한 생명을 설파하고 택한 김대건 신부

영원한 생명을 설파하고 택한 김대건 신부

조규식 세자 요한(대전 가톨릭 대학교수·신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성덕과 모범으로써 널리 공경을 받고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성 알로이시오 공사가(1568~1591년)나 프랑스의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1873~1897년) 같은 분들이다. 그들은 모두 20여 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각각 청소년과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서 전세계 교회에 의하여 공경을 받고 있다. 김대건 신부도 바로 그런 경우로서 그는 103위 한국 교회의 성인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분이다.

 

1821년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송산면 우강리)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때에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심 깊은 스승으로부터 신학을 공부한 다음 1845년 중국 상해 부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신품성사를 받았다. 곧바로 조선에 입국한 그는 서울과 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벌이던 중 선교사들을 영입할 목적으로 서해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1846년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세상을 마쳤다.

 

그는 25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통해서도 그의 이름 대건(大建)의 한문 뜻과 같이 정말 중요한 업적들을 이루어 놓았다. 그가 남긴 업적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의 저술들이다. 그는 마카오에 있는 스승 신부들에게 보내는 22편의 서한과 조선 교회에 관한 3편의 비망록을 남겼는데 이들은 모두 그의 동료 최양업 신부의 편지들과 함께 한국인에 의하여 최초로 서양 언어(라틴어)로 기록된 것으로서 매우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또한 일종의 행정 지도인 조선 전도를 작성하였는데(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 이는 그가 여러 방면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김 신부는 한국 교회의 103위 성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첫 사제라는 점, 그리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가 됨으로써 특별히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면 그의 삶이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서 사제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글에서 김 신부가 계속적인 박해 상황 안에서도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며 사제직을 수행하였는지 그 특징적인 면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의 사제적 삶의 교훈은 우선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제적 소명을 충실히 받아들이며 헌신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일 것이다. 박해 시대에 성직자들은 누구보다도 박해의 표적이 되었으므로 활동에 있어서 매우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신부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 안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사제적 소명을 수행해 나갔다.

 

그는 교회의 직무가 자신의 처지에서 어떠한 사적인 일보다 앞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부제로 잠시 귀국했을 때에 자신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말을 자기의 어머니께도 알리지 아니한 채 귀국 목적인 선교사 영입을 준비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성직자로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굳건하고도 용기 있는 모습은 그가 체포되어 재판정에서 취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재판관들과 형리들 앞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훌륭히 설명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나라의 법이 천주교를 금하지 않으면 천주교를 믿고 싶다는 말을 하게 했다.

 

김 신부의 이러한 사제적 직무에 대한 충실성은 자연스럽게 교회 권위에 대한 순명 정신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그의 사제적 삶의 또 하나의 특징이 되고 있다. 김 신부는 자신의 기록에서 장상들이나 스승 신부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공경하올” 등의 최대한의 경어를 쓰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순명하는 소자”, “당신의 가장 천하고 불초한 소자”와 같은 언어적 표현을 즐겨 썼다.

 

김 신부의 장상들은 이미 그의 마카오 신학생 시절에 스승 신부들이었거나 아니면 조선 입국 전 중국에서부터 그와 연관을 맺고 있던 이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김 신부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고 김 신부 또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에 대해 순명했다. 또한 그는 장상들이 조선에서 기후와 풍습에 적응하기 힘들어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참으로 그들을 위해 염려하면서 기도하였다. 김 신부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장상들에 대한 철저한 순명과 존경심은 바로 교회의 사제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필립 2,8 참조) 자신의 뜻을 버리고 복종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사제 직무 교령, 15항)에 상응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김 신부에게서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한 특별한 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복음 전파는 초기의 조선 교회 안에서 의심 없이 가장 중요한 교회적 사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그는 최초의 성직자로서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인식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는 조선을 항상 포교의 연관성 안에서 생각하면서 조선을 가리킬 때 흔히 “우리의 포교지”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이러한 선교에 대한 열망은 조선의 많은 이들이 참다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열망이기도 했다.

 

그는 복음 전파의 큰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망을 충분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상해에서 서품을 받고 귀국한 후 1년도 안되어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김 신부는 옥중에서 순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곳에 갇혀 있는 교우들을 위로했으며, 또한 다른 두 명에게 교리를 설명하고 표양을 보임으로써 세례를 받게 했다. 이는 그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사제적 직무를 수행하려 노력했으며 특별히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 하겠다.

 

김 신부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또한 그의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의 삶이다. 그는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며 철저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산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의 섭리로 보살펴 주신다고 믿으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교우들에게 보낸 옥중 서간에서 그가 혹독한 박해까지도 신앙을 깊게 하는 단련의 기회로 삼을 것을 가르친 데서도 드러난다. 그는 미래에 닥칠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갔다.

 

김 신부는 또한 박해의 어려움 중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렸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겪는 불행을 그대로 버려두고는 견디지 못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서한들을 보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시편 129편의 인용 등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이 같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의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탄생한 솔뫼는 조선 교회 초기부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내포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김 신부의 가정은 바로 그러한 내포 지방에서도 이름난 신앙 가정으로서, 장차 그의 가정 안에서도 세 명의 시성 성인(김 신부 외에 그의 아버지 김제준, 당고모 김 데레사)이 탄생되는 것이다. 김 신부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의 결실이라 하겠지만 이와 같은 그의 가정적 배경 안에서 받은 어렸을 때부터의 영향도 컸으리라고 본다.

 

그의 장상이었던 페레올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 후에 파리 외방 전교회로 보내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김 신부의 사제적 삶의 모습을 충분히 그려보고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 만치 유창한 말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행하는 데 있어 그는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 나았었고, 몇 해 동안만 실천을 하였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조선 포교지가 지금 처하여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은 것은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김 신부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많은 활동과 업무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의 삶은 그의 모든 활동의 바탕으로서 그의 사제적 삶을 더욱 값지고 훌륭하게 이끈 점이라 하겠다. 그의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 한다.”는 순교 직전의 고백 속에 이미 실현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