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 조광 -

 

 

 

김대건 신부는 감옥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 편지는 21통에 이르는 김대건 신부의 편자 가운데 유일한 우리글 편지이다. 그는 교우들이 돌려가면서 읽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옥중에서 이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원래 제목은 ‘교우들 보아라.’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1835년 이후부터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와 신자들 사이의 대화에는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쓰는 어법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26세의 젊은 청년 김대건은 신자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도 반말을 썼다.

 

그러나 오늘날은 초등학교에서까지도 스승이 학생에게 반말을 쓰지 말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리고 미사 강론을 반말로 하는 성직자는 더 이상 없다. 오늘의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를 현대문으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교우들은 보십시오

 

교우들은 보십시오. 우리 벗이여, 생각하고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아득한 태초로부터 천지만물을 지어 제자리에 놓으시고, 그중에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까닭[爲者]과 그 뜻을 생각해 봅시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있더라도 쓸데없습니다. 비록 주님 은총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니, 주님의 제자라는 이름도 또한 귀하겠지만 실천이 없다면 그 이름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그 은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짓는다면 어찌 태어나지 않은 것만 같겠습니까.

 

밭에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춰 밭을 갈고 거름을 주며, 더위에도 몸의 고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씨를 가꿉니다. 밭 거둘 때에 이르러서 곡식이 잘 되고 여물면, 땀 흘린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기뻐합니다. 곡식이 여물지 아니하고 밭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다면, 주인은 땀 흘린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내고 들인 시간[工夫] 때문에 그 밭을 박대합니다. 이같이 주님께서는 땅으로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을 벼로 삼으며,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시어 자라고 여물도록 하셨습니다. 마침내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주님의 은혜를 받아 여문 사람이 되었으면 주님과 의로써 맺어진 아들[義子]로 천국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물지 못하였으면 주님과 의로써 맺어진 아들이라 하더라도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알아둡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내려와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에서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운다 한들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 승천 후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두루 무수한 어려움 중에 자라왔습니다.

 

이제 우리 조선에 교회가 들어온 지 오륙십여 년 동안 여러 번 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오늘날 박해가 불길같이 일어나 여러 교우들과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여러분까지 환난 중에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애통한 마음이 어찌 없겠으며, 인간적인 정[肉情] 때문에 차마 이별하기에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에서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님께서 돌보신다.’ 했고, ‘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 하셨습니다. 어찌 이렇듯 한 박해가 주께서 하고자 하신 일[主命] 아니면, 주님의 상[主賞]이나 주님의 벌[主罰]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거룩한 뜻[聖意]을 따르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과 마귀를 공격합시다.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모르는[遑遑] 이런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서, 마치 용맹한 군사가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음과 같이 하여, 우리도 싸워 이겨냅시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도우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립시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爲主光榮],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해갑시다.

 

여기 감옥에 있는 20인은 아직 주님의 은총[主恩]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아주십시오.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편지글[紙筆]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만 그칩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전장(戰場)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공을 착실히 닦아, 천국에서 만납시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 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이런 박해 때는 주님의 시험을 받아서, 세속과 마귀를 물리쳐서 덕행과 공로[德功]를 크게 세울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고 영혼을 구하는 일’[事主救靈事]에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난날 성인성녀들의 자취를 단단히 닦고 실천하여[萬萬修治], 성스러운 교회[聖敎會]의 영광을 더하십시오.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이며 의로써 맺어진 아들이 됨을 증언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님께서 가련히 여기실[矜憐] 때를 기다리십시오.

 

할 말은 무수하지만, 있는 곳이 타당치 못하여 더 적지 못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입을 여러분의 입에 대어 사랑으로 입 맞춥니다[親口]. 부주교[副監] 김 안드레아.

 

세상 온갖 일은 주님의 뜻 아닌 것이 없고[莫非主命], 주님께서 내리신 상이나 벌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莫非主賞罰]. 그러므로 이런 박해도 또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바니, 여러분은 이를 달게 받아 참으면서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서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십시오. 내가 죽는 것이 여러분의 인간적 정과 영혼을 위한 큰일에 어찌 거리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나와 비교하여 더 착실한 목자를 상으로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마십시오.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하느님 앞에서 만나, 길이 영복을 누리기를 천번 만번 바랍니다. 안녕히들 계십시오. 김 신부가 사사로운 마음으로(私情), 정을 표해 드립니다(情表). 

 

남은 말

 

누구나 유서를 작성할 때는 비장한 마음을 갖는다. 김대건 신부도 죽음을 앞두고 조선의 신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유서를 남겼다. 이 글의 형식을 분석해 보면, 김대건은 감옥에서 틈틈이 이 글을 써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감옥에서 짬을 내어 일단 끝맺음한 편지에 다시 말을 덧붙여 살아남을 신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했다.

 

그는 우선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말로 자신의 편지를 맺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랑을 계속 전해 나갔다. 또한 김대건 신부는 자신이 조선교구의 교구장이었던 페레올 주교를 도와 사목하던 ‘부주교’임을 이 편지에서 밝히며 끝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여기에서 그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신자들에게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김대건은 감옥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이만큼 정성을 들여 신자들에게 글을 남겼다. 김대건이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권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 매진해 나가기를 당부했다.

 

자신을 잃고 서러워할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자신보다 더 훌륭한 목자를 상으로 주시리라 말하며 신자들을 위로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최양업과 같은 후배들을 생각하면서 복음화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신자들에게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하느님의 면전 앞에서 다시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이다지도 신자들을 사랑했던 김대건 신부가 오늘날 이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신자들에게 공손한 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리라 생각한다.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