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3)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3)

조선의 첫 사제

 

아, 드디어 우리 조선인 사제가 나셨네!

  

한양에 도착하다

 

1844년 12월,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소팔가자를 떠나 중국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으로 향했다. 12월 말 변문에 도착한 그들은 1845년 1월 1일 그곳에서 이미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유배 생활'을 끝내고 그리던 포교지 조선에 들어간다는 기쁨에 들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선 신자들의 말을 듣고 난 페레올 주교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조선 국경인 의주 변문쪽 경비가 삼엄해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상해 금가항 성당. 지금은 도시 계획으로

새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금가항 성당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페레올 주교는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로 했다. 신자들을 따라 의주 변문 근처에 온 김대건 부제는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한 후 다시 신자들을 만나 평양을 거쳐 1월 15일 한양 돌우물골(石井洞),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집에 도착했다.

 

한양을 떠난 지 9년 만이었다. 15살 소년은 24살 청년으로 장성했고, 부제품을 받은 어엿한 성직자 신분이 됐다. 조선을 향해 마카오를 출발한 지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네 번이나 입국로 탐사를 시도했고 두 번은 조선 땅 의주까지 들어왔으나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시도에서 김대건은 마침내 한양 땅을 밟았다.

 

힘든 여행 끝에는 뒤탈이 나기 쉽다. 김대건 부제가 그랬다. 어렵사리 한양까지 왔건만 피로한 몸을 추스르고 원기를 회복하기는커녕 병이 나고 말았다. 마치 오장육부가 끊어져 버리는 듯이 가슴과 배와 허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히 아팠다. 이렇게 보름 이상을 앓았다. 병이 좀 나았나 싶었지만 몸은 글씨도 쓸 수 없을 만큼 허약해졌다. 게다가 얼마 후엔 눈병까지 생겼다.

 

기력은 쇠진했지만 김대건은 조선의 첫 부제였다. 그는 자신이 한양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자들을 통해 서해안에 집을 한 채 물색토록 했다.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서해 바다를 통해 입국할 때 쉴 거처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을 구하는 데는 실패했고 대신 한양에서 집 한 채와 배 한 척을 구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머무르는 동안 신학생 2명을 곁에 두고 가르쳤다. 이들은 이미 앵베르 주교가 선발해 둔 신학생들이었다. 원래는 셋이었으나 한 명은 기해박해 때에 순교했다. 정하상 바오로였다.

 

김대건 부제가 한 일이 또 있었다.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김대건은 현석문(가롤로)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조선교회 창립시기 때부터 기해박해 때까지 조선교회사와 기해박해 순교자들 전기를 라틴어로 작성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두 신부를 비롯해 순교자 30여 명에 관한 내용을 정리했다. 형벌 종류와 순교 모습 등을 때로는 그림을 곁들여 가면서 실감나게 묘사했다. 훗날 「기해일기」로 편집되는 중요한 순교사료들이었다.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정리하는 김대건 부제에게는 자연스럽게 부친의 순교 모습도 떠올랐을 것이다. 생전의 부친 모습에 어린 동생과 어머니 얼굴이 교차된다. 그리운 어머니, 하지만 김대건 부제는 이미 신자들에게 엄명을 내린 상태였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입국 소식조차 알리지 말라고. 그러나 보고서를 써 내려가는 그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아버지 모습, 어머니 얼굴만은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최초 사제

 

1845년 4월 30일 김대건은 미리 준비해 놓은 배를 바다에 띄웠다. 남경(상해)으로 건너가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페레올 주교와는 변문에서 헤어질 때 이미 약속해 놓은 바였다. 사공 4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의 신자를 데리고 떠났다.

 

첫날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사흘간 계속해 폭풍우가 몰아쳤다. 종선(從船)을 끊고 돛대를 베어버리고 식량까지 내어던졌지만 폭풍우는 그칠 줄 몰랐다. 모두들 기진맥진했고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탈진하기는 김대건 부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함께 쓰러져 있을 수가 없었다. 품에 지니고 다니던 '바다의 별이신 성모' 상본을 꺼내 들고 기도를 바치며 용기를 북돋웠다. 예비신자 사공에게는 세례를 줬다.

 

▲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99년 복원한 라파엘호.

  

이렇게 인간적 노력을 다하고 나서는 그분 뜻에 그냥 맡겨드릴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다행히도 비도 그치고 바람도 약해져 있었다. 배에 남은 나무들을 다 모아 돛대와 키를 만든 후 항해를 계속했다. 역풍 속에 5일 동안 항해하다가 산동 배를 만났다.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어렵사리 허락을 얻어 그 배에 예인돼 18일 동안 항해한 끝에 마침내 상해 앞바다에 있는 오송항에 도착했다. 1845년 5월 28일이었다.

 

김대건 부제 일행은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고틀랑 신부에게 연락을 취했다.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 부제와 함께 배로 와서 조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몇 년 만의 고해성사요 미사 봉헌이었던가.

 

일찍이 주문모 신부 순교(1801) 후 30여 년 동안 사제 없이 지내다가 선교사제 3명을 맞이했으나 기해박해(1839)로 모두 잃은 터였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 건너 중국 땅 상해에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김대건 부제의 통역으로 성사를 보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그 배에서 감격어린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 신자들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대건 부제 심경은 또 어떠했을까.

 

상해에서 다시 페레올 주교를 만난 김대건 부제는 그해 여름 8월 17일 주일, 상해 연안 교우촌 금가항성당에서 마침내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조선 교회 첫 사제가 탄생하는 감격 어린 역사적 현장에는 조선 교우 11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서양 신부 4명, 중국 신부 1명 그리고 중국인 교우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증인이 돼줬다.

 

그 다음 주일인 8월 24일 김대건 신부는 상해 서쪽 교우촌 횡당(橫塘) 소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신부를 복사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다블뤼 신부는 마카오에서 페레올 주교를 만났고 페레올 주교 요청으로 조선 선교를 자원해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해로 건너왔었다.

  

다시 조선을 향해

 

이제 다시 조선으로 향하는 일이 남았다.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타고 갈 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배를 보는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그는 이렇게 편지에 남겼다.

 

"이 빈약한 조선 배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공포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배로 어떻게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은 모두 즐거워하였고 바다와 파도를 무릅쓸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그들은 주교와 함께 있으므로 이후 모든 위험을 면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순진함을 축복하시기를!…"

 

조선의 교우들은 그랬다. 그 교우들이 이제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주교를 모시고 조선 첫 사제를 모시고 출발했다. 1845년 8월 31일이었다. 배에는 선교사 또 한 사람이 동승했다. 김대건 신부 서품식과 첫미사에 함께 한 다블뤼 신부였다. 배 이름은 라파엘, 크기는 길이 25자(7.57m), 너비 9자(2.72m), 깊이 7자(2.12m)였다.

 

라파엘 호는 숭명도를 거쳐 중국 배를 모선으로 삼아 산동반도 쪽으로 항해했다. 잔잔하던 바다는 다시 거센 파도로 라파엘 호를 집어삼킬 듯 위협했고, 배는 조선에서 상해로 건너올 때 못지않은 풍파를 겪어야 했다. 난파된 배가 조류에 떠밀려 표류하다가 마침내 한 섬의 해변에 도착했는데 제주도 용수리 포구였다. 제주도를 떠난 지 15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배는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도착했다. 나바위였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11일,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