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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4)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4)

교우들아 보아라

 

조선 첫 사제의 선혈, 천상 하늘을 물들이다

  

▲ 김대건 신부가 처형된 새남터 형장에 세워진 새남터 순교성지 기념 성전 전경.

  

1846년 5월 13일 한강 마포 포구. 양반 한 명과 선원 예닐곱을 태운 배가 포구를 떠나 한강을 따라 서해로 내려가고 있었다. 조선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탄 배였다. 그는 7개월 전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강경 나바위로 입국, 한양 돌우물골(石井洞)에 거처를 두고 주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사목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서해를 통한 선교사 영입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 지시를 받고 이날 서해 입국로 탐사에 나선 것이다.

 

김 신부 일행이 탄 배는 고기잡이배로 위장해 연평도와 순위도를 거쳐 5월 28일에는 백령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중국 어선들과 접촉한 김 신부는 중국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과 자신이 작성한 조선지도를 전달한 후 6월 1일 황해도 옹진반도 남쪽 끝 순위도 등산진(登山鎭)에 닻을 내렸다.

 

낯선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본 등산진 관장은 김 신부를 찾아와 중국 어선들을 쫓아내는 데 배를 사용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어선들은 해마다 음력 3월부터 5월까지 이 일대에서 불법으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거절했다. 양반 배를 부역에 사용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서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 개척이라는 비밀스런 계획이 탄로가 날까봐서였다.

 

그게 화근이었다. 화가 난 포졸들은 김 신부 배의 주인인 임성룡과 사공 엄수를 붙잡아 관아로 끌고 갔고, 그들이 천주교인임을 알고는 밤중에 다시 배로 와서 김 신부를 체포했다. 6월 5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제 머리털을 잡아 한 움큼 뽑아내고, 저를 줄로 묶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매질을 하였습니다.… 해변에 이르자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저를 묶고 저를 다시 때리고 비웃고 조롱하며 관장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스무 번째 서한)

 

등산진 관장은 김 신부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고는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오히려 관장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파했다. 등산진영에 갇혀 있던 김 신부는 5일 후 해주로 압송돼 문초를 받았다. 황해감사 또한 김 신부를 중국인으로 여겨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러나 김 신부와 함께 붙잡힌 임성룡과 엄수를 통해 김 신부의 서울 거처를 알아냈다. 또 김 신부가 중국 배들과 연락을 하고 편지를 전달한 것까지도 파악하고는 포졸들을 보내 편지를 찾아왔다. 선교사 입국로 개척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도 본격화했다. 병오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6월 21일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 옥사에 갇힌 김 신부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김 신부를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고 김 신부도 자신을 광동 출신의 우대건(于大建)이라고 밝혔으나 6번째 문초에서 자신이 용인 출신 김대건으로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세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털어놓았다.

 

김 신부는 7월 19일까지 6차에 걸쳐 모두 40번이나 문초를 받았다. 온갖 회유와 위협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천주교 교리를 설파했다. 문초를 가하던 관리들과 조정 대신들도 탄복할 정도였다. 대신들은 김 신부에게 영국의 세계지도를 주면서 번역토록 했을 뿐 아니라 작은 지리개설서도 편찬토록 했다. 그들에게 김 신부는 천주학의 괴수였지만 또한 큰 학자였다.

 

▲ 지난 2006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새남터본당 신자들이 연출한 김대건 신부 순교 퍼포먼스.

 

 그러나 김대건은 조선의 첫 사제였고, 복음의 사도였다. 옥중에서도 그는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며 힘을 북돋웠고, 예비신자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었다. 임성룡의 아버지 임치백(요셉)과 김업이(막달레나)가 그들이었다.

 

김 신부는 7월 30일 매스트르 신부와 리브와 신부 등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자신이 붙잡히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조선교회를 구할 방도도 제안했다. 프랑스 영사를 통해 중국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조선 왕실이 선교사를 함부로 죽이지 못하도록 하고 신자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8월 초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3척이 충청도 서해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옥중 김대건 신부에게도 전해졌다. 김 신부는 그 배들로 인해 갇혀 있는 자신과 교우들이 어쩌면 풀려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모방ㆍ샤스탕ㆍ앵베르 세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항의서한만 전달하고 떠났다. 풀려날 희망은 사라지고 영웅적 순교만이 남아 있음을 깨달은 김대건 신부는 다시 먹을 갈고 써내려 갔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께서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이렇게 시작하는 글은 김 신부가 옥중에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이었다. 1846년 8월 말에서 9월 초순에 작성한 글이었다. 김 신부 서한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로 쓰인 약 2200글자의 회유문은 천주 신앙을 설파하면서 교우들에게 환난에 굴복하지 말고 굳은 신앙으로 견뎌낼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다. 김 신부는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1846년 9월 15일. 마침내 조정은 판결을 내렸다. "천주교 죄인 김대건을 효수경중(梟首警衆, 머리를 베어 백성들로 하여금 경계토록 함)하라."

 

김대건 신부는 이튿날인 16일 포도청에서 어영청으로 이송됐다. 어영청 군사들을 시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집행하기 위해서였다. 김 신부는 다시 형장인 새남터로 이송됐다.

 

새남터 백사장. 군문효수형을 구경하고자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죄수를 실은 감옥 달구지가 형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나팔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고 죄수는 옥에서 끌려 나왔다. 기다란 나무 두개로 투박하게 만든 가마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죄수를 태웠다. 가마는 군중 사이를 뚫고 형장으로 향했다. 형장인 백사장엔 긴 창이 꽂혀 있었고 창 꼭대기에는 깃발이 펄럭였다. 군사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죄수 김대건이 형장 가운데 도착했고, 관장은 선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외국인과 교섭을 한 죄로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선고문을 듣고 난 죄수 김대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죄수는 웃옷이 반쯤 벗겨졌다. 군졸들은 죄수의 양쪽 귀를 화살로 뚫고는 그대로 두었다. 그런 다음 죄수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회를 한 줌 끼얹었다. 두 사람이 죄수의 겨드랑이에 나무 몽둥이를 꿰고는 세 바퀴를 돌았다. 죄수는 무릎을 꿇렸다. 군졸들은 죄수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말뚝처럼 박은 창자루에 잡아맸다. 목을 내리치기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됐소."

 

칼을 든 군졸 12명이 죄수 주위를 빙빙 돌면서 한 번씩 목을 쳤다. 여덟 번째 칼을 맞고 목이 땅에 떨어졌다. 군졸 하나가 머리를 소반에 담아 관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형 집행을 확인한 후 조정에 보고하러 자리를 떴다. 1846년 9월 16일이었다. 조선 최초 탁덕 김대건 안드레아가 천상 영광에 든 날이었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25일,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