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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5)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다시 돌아보는 생애 (5)

남은 이야기(끝)

 

 

 

피어라 순교자의 꽃, 만개하여라 현양의 꽃

 

안장에서 시성까지

 

국법에 따르면, 처형당한 죄인의 시신은 3일 동안 형장에 나둬야 했다. 여기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경계토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 다음에야 친지들이 시신을 거둬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의금부 명령으로 사형을 당한 그 자리에 묻혔다. 형리들은 입은 옷 그대로 머리를 목에 갖다 붙이고는 깨끗한 거적으로 시신을 싸서 모래밭에 묻었다. 관장은 주변에 보초를 세우고 시신을 지키도록 했다. 교우들이 김 신부 시신을 가져갈까 염려해서였다.

 

김대건 신부의 영혼은 하느님 품에 받아들여졌지만 그 육신은 아직 버림받은 채 한강변 모래밭에 묻혀 있었다. 조선 가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강변은 고요했지만 아직 시신을 거두지 못한 교우들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40일이 흘렀다.

 

서 야고보를 비롯한 몇몇 교우들이 한밤에 새남터로 갔다. 모래를 헤치고 김 신부 시신을 찾아 홑이불에 싸서 1km 남짓 떨어진 와서(현 서울 용산우체국 뒤 군종교구청 부근)에 임시 매장했다가 다시 40km 넘게 떨어진 안성 미리내로 옮겼다. 교우 가운데는 17살 청년 이민식(빈첸시오)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1846년 11월 3일, 페레올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바랑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를 잃은 아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젊은 본토인 신부를 잃은 것이 내게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신부님은 쉽사리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그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 수가 있었으니 그의 성격과 태도와 지식은 그 성공을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포교지가 지금 처해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은 것은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입니다.”

 

페레올 주교는 이 편지와 함께 조선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의 순교 행적을 기록한 프랑스어 자료였다. 페레올 주교는 이에 앞서 그 해 9월 22일 현석문 등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의 순교 행적을 역시 극동대표부에 보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겨와 있었고, 마침 홍콩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기 최양업 부제가 머물고 있었다. 최양업 부제는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이 자료들을 라틴어로 옮겼다. 그 자료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었다. 이 자료는 이듬해인 1847년 로마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복시성성)으로 보내졌다.

 

10년 후인 1857년 9월 23일 교황청은 이 순교자 행적에 나오는 순교자 82명 전원을 가경자로 선포했다. 조선 최초 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김 신부를 신학생으로 선발한 모방 신부, 김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라치스코)도 포함됐다.

 

‘산 사람은 역사를 만들고 죽은 사람은 역사에 기억된다’는 말이 있다. 산 사람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부제는 조선 순교자들이 시복 · 시성에 이르는 첫 단추를 꿰는 일을 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죽은 사람 김 신부는 그 역사에서 중요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에서 복자 품에 올랐다. 이날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로서 가경자로 선포된 82명 중 3명을 제외한 79명이 시복됐다.

 

1949년 11월 15일 교황 비오 12세는 김대건 신부를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들의 주보로 선포했고, 이와 함께 김대건 신부의 축일을 김 신부 순교일인 9월 16일에서 김 신부가 시복된 날인 7월 5일로 옮겼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7월 5일에 지내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이어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김대건 신부는 1925년에 함께 시복된 78위 복자 및 1968년 시복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로마 바깥에서 거행된 첫 시성식이었다.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에 착좌한 뮈텔 민 주교가 내건 사목표어 ‘활짝 피어나라, 순교자의 꽃이여’가 마침내 활짝 피어난 것이다. 

 

김대건 신부 유해 이장

 

미리내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처음에는 이민식을 비롯한 인근 일대 교우들이 몰래 돌보고 있었을 것이다. 김 신부 시신을 미리내로 옮겨 안장하게 된 것도 이곳에 이민식의 선산이 있었고,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이 일대에 적지 않게 흩어져 살았기 때문이었다.

 

교우들은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미리내 김대건 신부 묘소 옆에 모셨다. 거센 물결을 헤치고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페레올 주교는 마침내 이승의 삶을 마치고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사제 김대건의 시신 옆에 나란히 누웠다.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긴 페레올 주교였다.

 

얼마 후 조선에는 또 한 차례 박해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병인년인 1866년에 시작돼 1873년까지 계속된 병인대박해였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미리내 교우들도 몸을 피했다. 박해가 끝난 후 교우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미래는 교우촌 모습을 회복했다.

 

1886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조사 때, 조선교구 재판관인 프와넬 신부가 김대건 신부 묘지 봉분 중앙을 열어 횡대(橫帶)를 발견한 후 다시 덮었다. 횡대란 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에 덮는 널조각을 말한다.

 

다시 십여 년 세월이 흐른 1901년 5월 20일 시복재판관 프와넬 신부와 서기 드망즈 신부, 미래내 주임 강도영 신부와 신자 약 30명이 김대건 신부 묘지를 발굴했다. 교우들 증언은 한결 같았다. 이곳이 바로 김대건 신부 묘지라는 것이다. 무덤을 열자 횡대가 나왔고 횡대를 치우자 관이 나왔다. 관 길이는 1m82cm였다. 관을 열고 유해를 쟀다. 머리 끝에서 발꿈치까지 1m62cm였다.

 

이들은 김 신부 유해를 여러 묶음으로 조심스럽게 싸서 미리내 사제관을 옮겼다. 김 신부 유해는 이틀 후인 5월 23일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도착해 신학교 성당 안에 안치됐다.

 

다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1950년 6 · 25 전쟁이 나면서 유해가 훼손될 것을 염려한 용산소신학교 교장 이재현(1909-1950?) 신부는 신학생 몇 명을 시켜 김 신부 유해를 성모상이 있는 마사비엘 화단 아래에 묻었다. 김 신부 유해는 9 · 28 수복 이후 다시 발굴, 1 · 4 후퇴를 즈음해 머리 부분만 경남 밀양성당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로 옮겨졌다.

 

1960년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이 준공되자 김 신부 유해는 다시 대신학교 성당에 안치됐다. 이때 두개골을 비롯한 굵은 뼈들은 신학교 성당에 안치됐으나 하악골은 미리내(성요셉성당)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됐다.

 

1983년 103위 시성 준비 일환으로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 안치된 유해에서 왼쪽 정강이뼈를 빼낸 후 다시 봉인했고, 1994년 2월 17일에는 그동안 유해를 보관해온 목관이 부식돼 납관으로 교체해 밀봉했다. 일주일 후인 2월 24일 신학교 대성당 석관에 안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성인들의 유해를 공경하는 교회 전통에 따라 많은 성당과 기관 혹은 개인들도 김 신부의 유해 일부를 보존하고 있는데 국내는 물론 상하이와 마카오, 파리, 로스앤젤레스에 이르기까지 유해를 보존하고 있는 성당이나 개인 단체 등은 20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인 유해를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성인의 정신을 본받고 살아가는 삶으로 활짝 피어나는 날, 그날이 김대건 성인의 현양이 올바로 이뤄지는 날일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1일,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