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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이달의 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이달의 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이달의 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 윤 클레멘트 신부 -

 

 

 

한국 최초의 사제(司祭), 처음 서양학문 유학자, 조선의 문호개방과 종교자유가 민족발전에 유익하다고 역설한 선각자, 짧은 기간이었어도 탁월했던 목자(牧者), 신덕(信德)과 용덕(勇德)의 겸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그는 1821년 8월 21일에 충남 당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46년 9월 16일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한 떨기 무궁화 되어 순교하였다.

 

어릴 적부터 비상한 재주, 굳센 성격, 진실한 신심이 드러났던 그는 1836년에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중에 1837년 8월과 1839년 4월에 두 번이나 일어난 마카오의 민란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로 피난하기도 한다. 롤롬보이에는 그가 나무 아래서 부모님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망고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1844년 12월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1845년 1월에 죽을 고비를 겪으며 압록강을 거쳐 일시 귀국하지만, 전교(傳敎)신부의 영입을 위해 다시 상해로 간다. 1845년 8월 17일에 상해에서 20-30리 떨어진 긴가항(금가항 金家港) 성당에서 강남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서품을 받았다.

 

그는 서품된 바로 그 달 8월 31일에 페레올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 9월 28일에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류하다 표착, 그리고 10월 12일에 강경 황산포에서 3km 떨어진 한적한 곳이던 익산 나바위에 그리워하던 조국 조선에 사제(司祭)되어 입국한다. 그는 입국 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배마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그가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택받았던 은이 공소(조선 최초의 본당)에 사목거점을 두고 목자 잃은 양과도 같던 전국의 조선신자들을 불철주야(不撤晝夜) 돌본다.

 

그는 조선 교우들을 위한 사목활동 중에서도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는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로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5월 14일에 마포를 출발, 5월 25일에 연평도에 도착, 등산진을 거쳐 마합포 앞마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국 어선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전하는 편지 6통과 지도 1장을 건네준다. 그리고 귀로에 오르던 6월 5일에는 순위도 앞바다에서 등산진 첨사에게 체포되어 해주 감영으로 이송된다. 6월 21일에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40여 차례의 신문을 받고 9월 15일에 국사범(國事犯)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날인 9월 16일에 장하고 태연하게 순교의 칼날을 받는다. 그는 사형장에서 사형선고문이 낭독되자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의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천주를 위해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고자 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에게 서품을 준 순교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그의 인품에 대해 말했다.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만한 유창한 말솜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과 당시 조선교회의 상황을 기록한, 하나의 하느님께의 봉헌록과 같은 25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특별히 옥중 고별서한은 눈물겹도록 감격적이다. “한반도 조선과 한국천주교회의 불멸의 별, 한국천주교회사에 우뚝 선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우리 한반도의 통일과 당신의 빛나는 신앙의 후예인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2011년 7월 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