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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12월 4일 성 요한(John) 사제 / 다마스쿠스

by 파스칼바이런 2012. 3. 29.

축일 12월 4일 성 요한(John) 사제

신분: 신부,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다마스쿠스(Damascus)

활동연도: 650?-754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은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며, 성 로마누스 작곡가(Romanus the Melodist)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이다.

 

성 요한은 그의 대표작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에서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의 '신학대전'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때의 다마스쿠스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성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이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고,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 외에 요한은 코스마(Cosmas)라 부르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코스마는 그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신학을 강조했다. 장성한 요한은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그의 스승 코스마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임 칼리프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코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아직도 성상 공경 문제가 쟁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과 코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은 그의 스승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여라."

 

이때부터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성서와 교부 문헌 연구 및 저술 활동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마스쿠스 거리로 나가 광주리를 팔았다고도 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코스마를 마유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성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그런데 코스마 주교는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양떼를 돌보았으나, 성 요한은 이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다시금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의 저서는 도처에서 읽혀졌으나 반대자들의 질시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754년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서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0년 8월 19일 교령에서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이달의 성인] 성 요한 다마센(657-749)

윤 클레멘트 신부

 

이슬람(Islam)의 창시자 모하마드(Mohammad, 570/571-632)가 세상을 떠나고 5년 후에, 빠르게 이슬람의 도시가 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Damascus)에서 그는 태어났다. 그는 마지막 그리스 교부로 일컬어지는데,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의 재정 관리로 일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세례를 받고 일찍부터 그리스도인 교육을 받는데, 그의 교육을 담당한 사람은 시실리에서 노예로 팔려왔다가, 요한 마다센의 아버지가 고가(高價)를 지불하고 데리고 온 고스마(Cosma)였다.

 

그는 고스마로부터 풍부한 신학적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43세가 되던 무렵에 그 도시의 재정 관리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예루살렘 근교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 수도원은 성 사바(Sabas, +531/532)가 시작한 수도원으로서, 한 성당을 중심으로 은수자들의 오두막이 둘러있는 독거(獨居) 수도원이었다. 수도자들은 각기 고독한 삶을 살아가면서, 전례나 수도원의 어떤 일들에만 다함께 모이곤 했다.

 

그는 그 독거 수도원에서 주로 신학원 저술을 하면서 고스마가 노래한 시편들을 작곡했다. 그런데 다른 수도자들이 고요한 생활을 방해한다고 불평들을 하자, 두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5세는 요한 다마센과 고스마를 그 수도원으로부터 나오게 한다. 그리고 고스마를 주교로 임명하고 요한 다마센에게는 사제품을 준다. 하지만, 그 어떤 관리 직무에도 맛을 못들인 요한 다마센은 다시 마르 사바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상본과 거룩한 그림들에 대한 흠숭가인 그가 열정을 다해 썼던 신학 저술들 중의 하나는 '상본(像本, Icon)들에 대한 흠숭'이었다.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흠숭받아야 하고 귀중한 전통은 보존되어야 한다면서 옹호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동방의 황제들은 성상파괴론자(聖像破壞論者)들이어서, 상본들에 대한 흠숭과 전례를 지키는 이들을 박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무슬림 지역의 안전한 친척 집에서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신학과 철학의 모든 분야들을 망라하였는데, 그는 본래부터 사상가가 아닌 사상의 한 위대한 조직가(組織家)였다. 그는 위기와 논쟁의 시대에 동방교회를 한결같이 연구하여 정통 그리스도인의 한 종합을 이루어 내었다.

 

그의 주요한 작품은 '지식의 원천'(The Fount of Knowledge)인데, 그리스 철학 - 존재와 물질, 행동과 가능성 등등 - 의 고전적인 관심들을 진단한다. 특히 '지식의 원천' 제3부는 '정통신앙에 대하여'(De Fide Orthodoxa) 말하는데, 하느님의 본성, 창조, 그리스도의 본성, 교회의 목적,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등을 다룬다.

 

그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 계획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사랑으로 보았는데, 교회가 하느님 사랑의 그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한다고 썼다.

 


  

 

 

성 요한 다마스체노 사제 학자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신앙을 옹호하는 저술과 능변으로 일명 크리솔호아스(Chrysorrhoas) 즉 황금의 강 혹은 황금의 웅변가라고 불리는 동방 수도자요 교부인 요한 다마스체노는 645년경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출생하였다.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가 기적적으로 개종한 곳으로 유명하지만 성 요한의 출생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는 다마스커스의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정부 관리로서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며 말 타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 외에, 사라센인들에게 포로로 잡히어 그 뒤에 석방된 이탈리아인 수사 고스마를 통하여 일반 학문은 물론 철학과 신학까지 배우게 되었다. 그가 후에 학자로서 대성하게 된 것은 이 훌륭한 스승의 덕분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날 즈음의 다마스커스는 회교도들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극히 불평등한 대우를 하고 세금을 과중하게 요구하고 사회적인 신분도 매우 낮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가끔 그리스도인과 유다인들을 요직에 앉히기도 했다. 그는 성장하여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관리가 되었는 바, 그의 우수한 재주와 학식과 성실성으로 말미암아 곧 회교도인 왕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당시 십자가나 성상, 성화에 대한 존경을 모조리 우상숭배의 미신으로 보고 이를 배척하며 이의 파괴를 주장하는 이단이 창궐하게 되고 동로마 황제 레오까지 가담하여 신자들을 박해하므로 요한은 분연히 일어나 십자가 및 성상 성화 공경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옹호하며 성상파괴론자들의 그릇됨을 논박하였다.

 

그러자 동로마 황제 레오가 이에 분개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상 공경을 금지한 것은 동방 교회 그리스도인인 레오 황제였지만 요한은 회교 영토에 살고 있었는지라 그를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왕에게 요한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이를 믿은 왕은 몹시 노하여 근위병을 시켜 요한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께 대한 신심이 깊은 그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밤중에 그의 절단된 팔을 깨끗이 붙여주어 그의 무죄를 증거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그의 축일 미사에선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얘기가 나오는 복음(마태 12,10)을 읽는 관습이 있었다.

 

그는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뜻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틀에게 나누어주고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그 후 성지를 순례하고 나서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말 사바의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의 스승 고스마와 더불어 수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라"(마르 4,22)고 했듯이 그들의 명성을 들은 예루살렘 총주교 요한 5세는, 먼저 고스마를 마후바의 주교로 축성하고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고스마는 죽을 때까지 주님의 양떼를 잘 보살폈으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에서 가르치며 신앙 문제에 관하여 주교들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다가 결국은 자기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수도원에서 신학자요 시인으로 살기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스승 고스마에게 성모님께서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라"고 분부했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많은 글을 썼다. 수집하여 자세히 논평을 가하는가 하면 교황의 수위권, 교회의 무류성 등을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께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성모 공경의 아름다운 신심서도 저작하였다.

 

그는 네 가지 분야에서 유명하다. 첫째 성상 공경을 반대하는 성상파괴주의자들과 당시의 이단자를 반박하고 성 교회의 진리를 옹호한 점으로 유명하고 둘째로 마지막 그리스 교부로서 그리스 교부들의 총서인 그의 저서 "전통신앙론"으로 유명하다.

 

이는 서방 교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견줄 만한 것으로 동방 교회에서 교육 자료로 사용하였다. 세째로 그는 시인으로서 로마누스 멜로디스토와 함께 동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두 시인으로 꼽히고 있으며 축일의 많은 찬미가를 지었다. 네째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섬과 마리아 축일에 관한 설교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망 날짜는 불확실하나 대개 749년경으로 보며 이에 의거한다면 104세까지 장수한 셈이다. 그러나 성상파괴론이 이단임을 선언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787년에 열렸으니 그의 성상파괴론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보기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셈이다. 말 사바 수도원에 묻히고 12세기까지는 그곳에 있었으나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그의 유해는 옮겨져 공경을 받았다.

 

요한은 "내 입에 당선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불혀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알아듣기 쉬운 말재능을 주시어 당선 현존이 언제나 나를 두루 살피게 해주소서. 주여, 나를 기르시고 나와 더불어 당신 자녀들을 길러 주시며, 내 마음이 우로나 좌로나 이탈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선하신 영께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어 내가 하는 일이 당신의 뜻에 맞게 하시고 또 죽는 날까지 그러하게 하소서"('신앙선언' 중에서)라는 그의 아름다운 기도처럼 일생을 살고 마쳤으며,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1890년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축일은 12월 4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7세기 후반 다마스커스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철학 교육을 받은 후 예루살렘 근처의 성 사바소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특히 성상 파괴를 주장한 이들을 거슬러 많은 신학서를 저술했다. 8세기 중엽에 세상을 떠났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사제의 [신앙 선언]에서

(Cap. 1: PG 95,417-419)

 

주여, 당신은 나를 당신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아버지의 허리에서 나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르시고, 자연의 법은 언제나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기 때문에 벌거벗은 아이로 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성령의 축복으로 사람의 뜻이나 육체의 본능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은총으로 내가 지음 받고 존재를 갖추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은 자연의 법을 초월하는 준비로써 나의 출생을 준비하셨으며, 광명으로 내보내실 때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하고 티없는 교회의 제자들 가운데 들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거룩한 말씀인 영적인 젖으로 나를 양육시켰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견고한 양식으로 나를 양육시키시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흘리시고 생명을 주는 그분 피의 거룩한 잔으로 나를 도취시키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당신 외아들을 보내 주셨고 그분은 당신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어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희생 제물로 바친 어린 양처럼 자원하여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즉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시었고, 이렇게 자신의 인간 의지를 굴복시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이신 당신께 순종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여, 당신은 길 잃은 양인 나를 당신의 어깨 위에다 메기 위해서 스스로를 낮추셨고 푸른 목장에서 나를 기르셨으며 당신이 뽑으신 그 귀중한 양 떼를 기르기 위해서 당신이 직접 양육하시는 목자의 손 아래 참된 교훈의 물로 나를 양육시키셨습니다.

 

주여, 이제 당신은 나를 주교의 손을 통하여 당신 자녀들을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의 섭리 속에 나를 그렇게 선택하셨는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 홀로 그것을 아십니다. 주여, 당신의 마음을 매우 상하게 해드린 나의 무거운 죄의 짐을 가볍게 해주소서. 내 영혼과 마음을 깨끗이 해주소서. 환하게 비추는 등불처럼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내 입에 당신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불혀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알아듣기 쉬운 말 재능을 주시어 당신 현존이 언제나 나를 두루 살피게 해주소서. 주여, 나를 기르시고 나와 더불어 당신 자녀들을 길러 주시며, 내 마음이 우로나 좌로나 이탈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선하신 영께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어 내가 하는 일이 당신의 뜻에 맞게 하시고 또 죽는 날 까지 그러하게 하소서.

 

그리고 온전한 순결의 정상이고 하느님의 안식처이며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교회의 무리여,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교회를 굳건히 하는 오류 없는 신앙의 교리를 우리 손에서 받으십시오.

 

 


 

 

 

 

 

  


 

[이달의 성인] 성 요한 다마센(657-749)

성 요한 다마스체노 사제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