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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회미술산책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7) 앨리슨 와트(Alison Watt, 1965~)

by 파스칼바이런 2014. 4. 30.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7) 앨리슨 와트(Alison Watt, 1965~)와 ‘고요 Still’

 

 

제단화에 깃든 시리도록 흰 슬픔 고요한 평화

막 들어 올린 듯 캔버스를 감싼 천의 주름들 인상적

부드러운 고요, 지루하지 않은 정적 자아내는 ‘곡선’

순교 당한 성 세라피온 시신 감싼 겉옷에서 영감 얻어

 

 

앨리슨 와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작가로서 그리녹(Greenock)에서 태어나 글래스고우 예술학교(Glasgow School of Art)를 졸업했다. 1989년에는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 퀸 마더(Queen Mother)의 초상을 그려 국립초상화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에 전시할 만큼 인물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1997년 에딘버러 후르트마켓 갤러리(Fruitmarket Gallery) 전시 ‘fold’를 기점으로 그녀의 작품세계는 전환점을 맞았다. 신고전주의 작가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영향을 받아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그녀는 여러 전시에서 천의 주름과 부드러운 감촉을 시각화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2000년 스코틀랜드 국립현대미술관(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이하 SNGMA)에서 개최된 12개의 대형 작품 전시는 SNGMA에서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젊은 예술가의 솔로전시였다. 그녀의 작업 활동은 주로 흰색 천의 접힌 주름을 대형화면에 재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번 2014년 여름에도 퍼스 박물관과 예술 갤러리(Perth Museum and Art Gallery)에서 그녀의 작품들이 전시될 계획이다.

 

▲ 올드 세인트 폴 성당 내부. 원내는 앨리슨 와트의 제단화.

 

▲ 앨리슨 와트(Alison Watt), ‘고요 Still’, 2004, 올드 세인트 폴 성당 내 기념 채플, 에딘버러.

 

 

그의 작품 <고요 Still>는 2004년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Edinburgh Festival)기간 동안 올드 세인트 폴 성당(Old St Paul’s Church)의 기념 채플(memorial chapel)에 설치되었던 <고요 Still>라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성당에 비치되어 있다. 앨리슨 와트는 이 작품으로 2005년 교회공간을 후원하는 예술작품상인 에이스(ACE:Art+Christianity Enquiry)상을 받았다. 12피트나 되는 대형 작품 <고요>는 얼핏 보아서 한 개의 캔버스처럼 보이지만 4개의 캔버스가 모여 있는 형태이며 각각의 캔버스들 사이에 생긴 공간들이 십자가를 만들어낸다.

 

작품이 소장된 올드 세인트 폴 교회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의 역사 속에서 1883년 새롭게 재건된 건물이었다. 성당의 주제단 왼쪽, 작품이 설치된 기념 채플은 세계대전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었다. 100년이 넘은 성당의 중후함은 한편으로 성당의 분위기를 무겁고 어둡게 만들었다. 작은 아치형 입구를 지나 컴컴한 기념 채플 안에 들어선 감상자는 어둠 속에 만개한 순백색의 장미같은 캔버스에 압도당할 것이다. 이 압도적인 흰 색면의 캔버스에는 세월이 만들어내서 검게 그을린 벽 위로 지금 막 들어 올린 듯 천의 주름들이 캔버스를 감싸며 걸려 있다. 대조적으로 검은 벽과 그 벽(작품 측면벽) 위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은 공간의 숙연함과 고요를 지배하고 있다. 감촉으로 느껴질 만큼 시각화된 곡선들은 부드러운 고요, 지루하지 않은 정적을 자아내면서 감상자가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장시켜 상상 속에 놓아둔다. 과연 어디로부터 누구에게 드리워진 것일까?

 

작품을 제작하는 1년 동안 앨리슨 와트는 매일 이 기념채플을 방문했고 17세기 스페인 작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의 <성 세라피온 Saint Serapion>(1628)에서 영감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무엇보다 순교 당한 세라피온의 시신을 감싸고 있는 겉옷에서 무한한 슬픔과 성스러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옷이란 삶의 한부분이고 옷을 이루는 천들은 인간이 느끼는 매순간에 현존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신체와 가장 밀착되어 삶의 장면들을 익숙하게 목격하는 물질, 그 자체인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스치고 지나가는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자신이 나을 것이라 믿었던 여인처럼…천은 모든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고요한 채플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져 걷어 올려진 옷자락을 본다. 그 어떤 제단화가 이토록 시리도록 흰 슬픔과 고요한 평화를 선사하는가.

 

 

 

최정선 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대에 출강 중이며,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