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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30) 쿠니베르트 블라시오 오트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30.

[덕원의 순교자들] (30) 쿠니베르트 블라시오 오트 신부

수용소에서조차 청명한 웃음으로 희망 심어준 착한 목자

 

 

쿠니베르트 블라시오 오트 신부(Kunibert Ott)

 

▲출생: 1912년 7월 2일 독일 아욱스부르크 에델쉬테텐

▲세례명: 블라시오

▲첫서원: 1934년 5월 14일

▲종신서원: 1937년 5월 17일

▲한국파견: 1937년 8월 29일

▲사제수품: 1939년 4월 30일

▲소임 : 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2년 6월 28일, 옥사덕수용소

 

 

▲ 오트 신부가 1939년 4월 30일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있다.

 

▲ 오트 신부(뒷줄 맨 오른쪽)가 사제수품후 동료 새사제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육신은 참혹했지만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님은 늘 평온하고 밝았습니다. 어린애 같은 청명한 웃음소리가 온 수용소에 울려 퍼지곤 했습니다. 그분이 떠나시자 그 허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옥사덕수용소에서 날마다 14시간씩 강제노동으로 혹사당하면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화해를 이루려 노력했던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 그는 수용소의 모든 수도자에게 헌신적 태도와 선량함으로 희망을 안겨줬던 그리스도의 참 제자였다.

 

그는 1912년 7월 2일 독일 아욱스부르크 크룸바크 근교 에델쉬테텐에서 농부인 아버지 미하엘 오트와 어머니 요세파 피셔 사이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블라시오. 그의 누이인 루이트라우트 수녀는 교육자로 유명한 수도자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그의 아버지는 1917년 4월 9일 전사해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웠다. 7살 때부터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오트는 여동생 페피(루이트라우트 수녀)와 미사 놀이를 하면서 성장했다. 미사 놀이에 너무 몰입한 그는 "수녀가 되라"며 여동생의 긴 머리를 싹둑 잘라 가족들을 기겁하게 하기도 했다.

 

1923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소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21살이 되던 1933년 5월 12일 '쿠니베르트'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이후 1934년 5월 14일 첫서원을 한 뒤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했고, 1937년 5월 17일에 종신서원을 했다. 그는 젊은 수도자들이 사제품을 받기 전에 장래 소임과 선교지 언어에 익숙해지길 희망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요청과 나치 정권의 수도원 박해로 그 해 8월 8명의 신학생과 함께 한국으로 파견됐다.

 

1937년 9월 4일 증기 화물선에 승선해 홍콩과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입국해 덕원수도원에 도착했다. "우리 배의 선장은 히틀러 총통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배는 항해 내내 아슬아슬했다. 여러 항구에서 기자들이 적재 화물을 보려고 했으나 승선을 거부당했다. 우리 8명의 신학생을 배에 함께 태운 것도 거룩하지 않은 화물을 거룩한 수도복으로 감추려는 의도인 듯했다"(오트 신부, 1937년 여행기 중에서).

 

그는 덕원신학교에 편입해 1939년 4월 30일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고원본당에서 2개월간 사목 실습을 한 후 영흥본당 보좌로 발령받았다. 그는 선교사로서 새 임지로 떠나면서 "한국의 풍광은 정말 아름답다. 곳곳에 언덕과 산이 보이고, 그 사이 골짜기는 낭만적인 마을과 논을 끼고 있다. 마을은 온통 초가인데 사람들은 몹시 가난해 황소 한 마리만 키워도 꽤 부자다"라는 내용을 적어 누이 수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44년 가을 고산본당 보좌로 부임한 그는 해방을 맞아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온 1945년 8월 이후 수녀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무척 애를 썼다. 수도원에서 재정 지원을 해주지 않아 늘 자급자족해야 했던 그는 본당 텃밭에 채소와 포도나무 등을 심고 돼지 몇 마리를 키우며 생활했다.

 

무엇보다 그는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사목자였다. 아무리 멀어도 환자들을 찾아가 병자성사를 줬고, 결핵을 앓던 수녀가 선종하자 무덤에 세울 시멘트 받침대가 달린 나무 십자가를 직접 만들어 손수레에 싣고 묘지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날랐다.

 

1949년 5월 11일 동료 수도자와 함께 덕원수도원에서 보위부에 체포된 그는 평양인민교화소를 거쳐 옥사덕수용소에 수감됐다. 원래 폐가 약했던 그는 한겨울 만포 피난 행군으로 심장 협착증이 생겨 사지가 퉁퉁 부어올라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늘 명랑하게 웃으며 쉬지 않고 일했다. 30℃가 넘는 여름날,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비탈에서 날마다 14시간씩 강제 노동에 시달려 탈진한 동료들을 위해 지친 몸으로 5분간 휴식시간 때마다 쑥차 양동이를 들고 와 갈증을 없애줬다.

 

1951년 6월 13일 미사 집전 후 위출혈로 쓰러진 그는 하느님 나라로 건너감을 뜻하듯 "이번에는 될 거예요"라는 말을 남긴 후 6월 14시 새벽 5시 30분에 선종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는 매우 고결하고 헌신적이며 쾌활하고 사심없는 성인같은 사제였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리에 계셨고, 수도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많은 사람에게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증언했다"(아르사티나 에이그너 수녀, 루이트라우트 오트 수녀에게 보낸 1989년 4월 6일자 편지 중에서).

 

"다들 그를 '명랑하고 늘 웃을 준비가 돼 있는 마부'라 했다. 쿠니베르트 신부는 수용소에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화해를 이루려 노력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엘리지오 콜러 신부가 직무를 내려놓은 후 그를 책임자로 뽑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육신은 참혹했지만 쿠니베르트 신부는 늘 평온하고 밝았으며, 어린애 같은 청명한 웃음소리가 온 수용소에 울려 퍼지곤 했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