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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회미술산책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19) 스탠리 스펜서와 ‘광야에서의 그리스도 : 전갈’

by 파스칼바이런 2014. 11. 18.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스탠리 스펜서와

‘광야에서의 그리스도 : 전갈’ (19)

 

세상 연민에 가득찬 광야의 예수

잊었던 것에 대한 의미 있는 ‘바라보기’ 시사

‘광야 시리즈’ 9개 작품 중 하나, 정사각형 구도 독특

 

발행일 : 2014-11-16 가톨릭신문 [제2919호, 14면]

 

 

▲ 스탠리 스펜서, ‘광야에서의 그리스도 : 전갈’(Christ in the Wilderness : The Scorpion),

캔버스에 유채, 1939, 퍼스(perth) 서호주 아트 갤러리.

 

 

▲ 스탠리 스펜서

 

영국 버크셔 주(州) 쿠컴(Cookham) 출신의 스탠리 스펜서(Stanley Spencer, 1891~1959)는 어려서 홈 스쿨로 교육을 받았다. 처음엔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삽화집이나 카툰, 동화책, 종교 서적 등을 통해 상상력을 키웠고 집에 걸려있던 터너와 루벤스 같은 대가들의 복제품을 통해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국교회 신자였던 아버지와 감리교 신자였던 어머니 덕분에 종교적 영감을 지니게 된 그는 슬래이드 미술학교(Slade School of Art)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전통적인 영국미술, 실험적인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전통과 현대를 총망라한 대가들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이는 독특한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형성하는데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스펜서는 작업초기 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와 샌햄 기념 채플(Sandham Memorial Chapel) 벽화를 제작하는 등 자신의 고향에서 오랜 시간 작업을 해 왔고 고향을 사랑했던 탓에 ‘쿠컴’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전쟁, 가정, 노동, 풍경, 주변 인물, 그리고 성(性)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때로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하면서 왜곡된 인물 형태나 독특한 공간과 구도, 색채의 사용 때문에 모더니즘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릴 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립아카데미 회원이었고 구상회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새롭게 주목받았으며 20세기 영국 구상회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종교화에서 ‘십자가 처형’이나 ‘부활’ ‘구원’ 등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이러한 일들이 마치 현대 일상적인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때로는 동화 속 인물들을 현실에 대입하듯 작품을 해 왔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교심을 유발하고 예배의 목적으로 제작되었던 일반적인 종교화들과 차별화된다. 그가 이러한 작업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상세계 안에서 신성함과 경건함을 동시에 추구하려던 그의 종교적 신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광야에서의 그리스도 : 전갈’은 스펜서가 1939년부터 1954년까지 작업한 ‘광야 시리즈’ 9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독특하게도 정사각형(56×56cm)의 캔버스에 그려진 광야 시리즈에서 예수는 둥근 외모에 마음씨 좋은 중년 아저씨의 인상으로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등장한다. 오랫동안 깍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과 풍성하지만 헝클어진 머리, 맨발의 모습이 아니라면 누가 이 인물을 광야에 있는 예수라고 생각하겠는가. 내면의 동요나 유혹, 그리고 고통 때문에 마르고 지쳐 보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은 채, 예수의 풍모와 행동은 그저 오지의 자연 속에서 지내는 야인 정도로 보인다고나 할까.

 

9개의 시리즈에서 예수는 아침에 깨어나 기도하려고 산을 오르며, 꽃을 돌보고, 전갈이나 여우, 암탉, 독수리들과 함께 지내며 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스펜서는 이런 예수를 카메라 줌으로 당겨서 감상자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크기의 인물로 그려 놓았다. 심지어 예수의 머리는 먹구름 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갈색 톤이 지배적인 화면에서 예수는 그가 곧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독보적으로 등장하지만, 그래서 더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게다가 자갈땅에 주저앉아 위험천만한 전갈을 손바닥에 놓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진중한 정도를 넘어 애잔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 독침을 지닌 이 작은 전갈은 예수를 위협하는 동물이 아니라 측은하고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바라보기’는 단순히 무념무상인 상태로 있는 ‘멍 때리기’가 아니다. 광야 생활은 보잘 것 없고 때로 잊고 지냈던 것에 대한 의미 있는 ‘바라보기’이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오 4장 1절)는 구절에서 우리가 그동안 간과했던 것은 무엇일까. 용감하게 광야로 초대하는 스펜서의 예수는 광야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부르심과 은총의 장소이고 창조된 자연에 우리의 온몸과 마음이 물드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최정선씨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대에 출강 중이며,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