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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21) 유항검 생가터, 초남이성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11. 29.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21) 유항검 생가터, 초남이성지

 

 

전주라 하면 많은 사람이 한옥마을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경기전과 향교, 동헌, 오목대 등 역사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이렇듯 전주는 예로부터 유교 문화가 뿌리 깊게 박힌 선비의 고장이었다. 그만큼 천주교 핍박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전주교구 순교자 중 정문호와 조화서ㆍ손선지ㆍ이명서ㆍ한재권ㆍ정원지ㆍ조윤호 등 7위는 1984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올해 8월,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등 전주에서 치명한 23위가 복자가 됐다. 그들의 순교지 중 한국천주교회의 첫 순교자들이 치명한 풍남문 밖을 찾았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죠.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 대부분은 먹을거리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보다 전주에는 전동성당, 풍남문, 경기전, 최명희 문학관처럼 보고 배울 곳이 참 많거든요. 한옥마을은 다녀가지만 역사적 의미는 제대로 모르고 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전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타 “한옥마을로 가자”고 하자 기사가 아쉬운 얘기를 쏟아냈다. 요즘 관광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전주천 주변을 따라 달리는 10분 동안 계속됐다. 신문에 전주의 순교지를 소개할 거라 했더니 그는 “많은 사람이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게끔 글 좀 잘 써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남부시장 근처 교차로에 차를 세웠다.

 

 

▲ 복자 4위와 순례지 약도

 

차로를 사이에 두고 커다란 옛 성문과 전동성당, 경기전이 모여 있었다. 바로 그곳이 첫 순교자 윤지충의 목이 잘린 자리, 즉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가 시작된 자리였다. 이곳에서 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ㆍ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ㆍ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이 순교했다.

 

▲ 전주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풍남문.

 

 

순교자의 피는 얼지 않았다

 

남쪽을 향해 세워진 옛 성문은 가을볕을 그대로 받아 더욱 웅장해 보였다. ‘풍남문’(豊南門), 조선 시대 전라감영을 두고 쌓았던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었다. 원래 동서남북 네 곳에 대문이 있었지만 소실되고 현재는 남문만 남았다. 당시 풍남문 밖은 장이 열려 많은 사람에게 처형의 본보기를 보이기 좋은 곳이었다. 1791년 겨울, 어머니 유언에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과 권상연도 이곳으로 끌려 왔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잔치에 가는 사람처럼 마냥 기쁜 표정으로 주변 사람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칼을 받았다. 정확히 10년 뒤,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이 같은 자리에서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다. 참수한 뒤 몸과 팔, 다리를 토막 내 전국 곳곳에 보내는 무시무시한 형벌에도 그들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윤지헌의 마지막 말을 통해 굳은 의지를 알 수 있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머리는 풍남문 밖에 걸렸다. 그때 머리에서 떨어진 피가 땅에 떨어져 고였는데 매서운 추위에도 절대 굳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뜨거운 신앙심을 확인시켜주는 기적이었을 것이다.

 

▲ 전동성당과 풍남문의 거리는 약 200m. 전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유항검과 윤지헌이 치명한 자리에 세워졌다. 순교 복자들의 고초와 죽음을 바라본 전주성 성벽은 전동성당의 주춧돌이 됐다.  

 

 

처형장 성벽 돌, 교회 주춧돌 되었네

 

풍남문에서 태조로 방향으로 길을 건너면 한옥마을이 눈에 펼쳐진다. 한옥마을이 시작되는 길목 초입에 호남의 모태 본당, 전동성당이 한옥들 사이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자랑하며 서 있다. 성당 마당 앞쪽, 순교자 모습을 담은 동상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십자가를 들어 보이고 있고, 한 명은 칼을 쓴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 사이에서 관광해설사가 말했다.

 

“여러분, 여기 순교자상이 보이시나요? 올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시복식에서 이름 불렀던 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입니다. 전동성당은 두 분이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곳이랍니다.”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정확히 100년 후 파리외방전교회 두보네 신부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두보네 신부는 복자들의 순교기를 지켜보았을 전주성 성벽과 흙으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다.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전동성당 바로 맞은 편에는 사적 제339호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순교자를 핍박했던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건물과 복자들의 피가 서린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괜스레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유항검 생가터, 초남이성지

 

▲ 초남이 성지에는 웅덩이로 변해버린 유항검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유항검은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다. 가족 역시 순교하거나 유배됐다. 그리고 그가 살던 집은 파가저택(破家澤)됐는데, 대역죄인의 집을 부수고 그 터에 못을 만든 것이다. 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을 빠져나와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 익산 쪽으로 100m 지나 ‘동정 부부 생가터’ 안내판을 따라 5㎞를 들어오면 초남이 성지에 닿는다(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마을).

 

초남이 성지는 유항검이 1754년에 태어난 곳이자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 며느리 이순이(루갈다)가 4년간 동정 생활한 곳이다. 이곳에는 파가저택 후 웅덩이가 된 그의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전주교구에서 성지로 조성해 웅덩이를 사이에 두고 한쪽엔 제대, 반대편에는 신자석을 마련해 놓았다.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면 유항검 일가의 신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백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