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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by 파스칼바이런 2015. 10. 16.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

 

 

 

 

서기 325년 - 381년 사이에 확정된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삼위일체 신앙고백을 확실하게 담고 있기에 "사도 신경" 보다 훨씬 더 나은 완전한 형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라티어로 그냥 아무런 설명없이 Credo (우리말: 신경)라고 부를 경우에는 대개가, "사도 신경"이 아니라, 바로 이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혹은 간단히 줄여서 "니체아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니체아신경

라틴어-Symbolum Nicaenum

영어-Nicene creed

 

① 니체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배격하고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채택한 신앙 고백문. 이는 체사레아 또는 예루살렘의 세례 신경을 모체로 하고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문구들을 가미하여 만든 것이다. 이 신경은 성삼위에 대한 믿음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성자의 동일실체(同一實體), 그의 강생, 죽으심,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②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채택한 신앙고백문. 이 신경은 칼체돈 공의회(481년)에서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고 하여 낭독되었으므로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 불려지며, 니체아 신경을 발전시킨 것이라 하여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또는 간단히 ‘니체아 신경’이라고도 불려진다. 이러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신경의 기원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리고 있다. 유력한 견해에 의하면, 이 신경은 니체아 신경과는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동일할 뿐이며, 이 신경을 그의 책(Ancor. 118. 9-113)에서 인용한 에피파니오가 이 신경을 만들고(374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채택하였다. 이 신경은 앞의 ①항의 신경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동질’(同質, homoousios)이라 표현한 데 대하여 ‘성부와 일체’라고 묘사하며, 성령의 위치와 존재를 확대 설명하고 교회와 성사, 육신의 부활, 영생 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5세기 시리아에서 성찬의 전례에 도입된 이 신경은 스페인을 비롯하여 서방교회에 전해졌으며 마침내 1014년 헨리 2세의 요청에 응하여 로마에 보급되었다. 오늘날 라틴전례의 미사 통상문에는 이 신경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CREDO)

 

Credo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끄레도 이 누눔 데움 빠뜨렘 옴니뽀뗀뗌)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factoru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팍또렘 첼리 엣 떼레, 비씨빌리움 옴니움 엣 인비씨빌리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의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Et in unum Dominum Jesum Christum,

(엣 ㅌ이 누눔 도미눔 예숨 끄리스뚬,)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Filium Dei unigenitum,  et ex Patre natum ante omnia saecula

(필리움 데이 우니제니뚬, 엑 엑ㅅ 빠뜨레 나뚬 안떼 옴니아 쌔꿀라)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Deum de Deo], Lumen de Lumine,

([데움 데 데오] 루멘 데 루미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Deum verum de Deo vero,

(데움 베룸 데 데오 베로)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genitum, non factum, consubstantialem Patri;

(제니뚬, 논 팍뚬, 꼰숩ㅅ탄ㅌ시아렘)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per quem omnia facta sunt.

(페ㄹ 꾸엠 옴니아 팍ㅋ따 쑨ㅌ.)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qui propter nos homines

(뀌 쁘롭떼ㄹ 노스 호미네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et propter nostram salutem

(엣 쁘롭떼ㄹ 노스뜨람 쌀루뗌)

저희 구원을 위하여

 

descendit de coelis,

(데ㅅ쎈딧ㅌ 데 첼리스,)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

(엣 인까르나뚜스 에스뜨 데 스피릿뚜 싼또 엑스 마리아 비르지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et homo factus est;

(엣 ㅌ호모 팍뚜스 에스뜨)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crucifixus etiam pro nobis sub Pontio Pilato, passus et sepultus est;

(크루ㅅ치픽수ㅅ 엣ㅅ치암 쁘로 노비스 숩 폰ㅊ씨오 삘라또, 빠쑤ㅅ 셋 쎕뿔뚜쓰 에스뜨,)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et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us;

(엣 렛수렉싯ㅌ 떼르ㅆ치아 디에 쎄꾼둠 스크립뚜루스,)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et ascendit in coelum, sedet ad dexteram Patris;

(엣 ㅌ앗센디트 인 첼룸, 쎄뎃ㅌ 아 덱스때람 빠트리스.)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et iterum venturus est, cum gloria, judicare vivos et mortuos;

(엣 이떼룸 벤뚜루스 에스뜨, 꿈 글로리아, 유디까레 비보스 엣 모르뚜오스,)  

(그 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오시리니,

 

cujus regni non erit finis.

(꾸유스 레니 논 에리트 피니스.)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Et in Spiritum Sanctum, Dominum et vivificantem,

(엣 ㅌ인 스피리뚬 싼뚬, 도미눔 엣 비비피깐뗌,)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

(뀌 엑스 빠뜨레 필리오꾸 쁘로세디트,)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qui cum Patre et Filio

(뀌 꿈 빠뜨레 엣 필리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simul adoratur et conglorificatur;

(씨물 아도라뚜르 엣 꼰글로리피까뚜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qui locutus est per Prophetas.

(뀌 로꾸뚜스 에스뜨 뻬ㄹ 쁘로뻿따스.)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엣 ㅌ우남, 싼땀, 까똘리깜 엣 ㅌ아뽀스똘리깜 엣끌레씨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를 믿나이다.

 

Confiteor unum baptisma in remissionem peccatorum;

(꼰피떼오르 우눔 밥띠스마 인 레비ㅆ씨오넴 뻭까또룸,)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et expecto resurrectionem mortuorum,

(엣 엑스뻭또 렛수렉ㅆ치오넴 모ㄹ뚜오룸,)

죽은 이들의 부활과,

 

et vitam venturi seculi.

(엣 피땀 벤뚜리 쎄꿀리.)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Amen.

(아멘.)

아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가톨릭신문 : 2001-06-17 [제2254호, 16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교리 확립”

381년 150여명의 동방교회 주교들만 참석

성령배격론자·신아리우스주의 등 이단 배격

 

 

▲ 성 이레네성당  381년 제1차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된 성 이레네 성당. 십자가 형태의 이레네 성당은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성당으로 개조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친 도시이면서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비잔틴 시대에는 비잔티움으로 불렸던 역사적 도시로 1923년까지 1600여년 간 이 나라의 수도였으며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로마제국을 지배하던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통일하자 제국의 새로운 수도, 신 로마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귀족과 기득권 층의 끊임없는 음모와 술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지리적으로는 방대한 영토의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서쪽으로 치우친 로마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종교적으로도 제국 일치의 이념으로 삼은 그리스도교의 장려를 위해 우상숭배에 찌든 로마와는 다른, 순수한 신앙도시의 건립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마르마라 바다와 보스포르스해, 수심 깊은 골드 혼이 3면을 둘러싸고 있고 천연적 요새 지역인 이 곳에 6년간의 대공사 끝에 도시를 완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했다. 뿐만 아니라 성 이레네 성당과 소피아 성당 등을 건축해 도시전체를 신앙 도시화하여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다.

 

교회사적으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은 초세기 교회를 뒤흔들어 놓은 아리우스 이단 논쟁을 종식시키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논쟁

 

교회는 처음부터 성령께 대한 신앙을 고백해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관습이 초창기부터 정착되어 왔었고 박해시대 교회나 교부들도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해왔다.

 

이어 제국교회 시대에 접어들면서 외적인 위험이 사라지고 그리스 철학과의 만남은 수많은 교리논쟁을 불러왔고 이단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아리우스 사상이 대표적이었는데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화급한 문제였던 성자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선포하고 성령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성령을 믿는다」고 하였다.

 

니체아 공의회 이후에도 아리우스파의 소동은 계속되었고 세미(半) 아리우스주의자들인 마케도니우스파는 성령의 신성마저 거부했다.

 

이는 황제들의 종교적 성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361년 아리우스파의 옹호자였던 콘스탄시우스가 사망한 후 아타나시오는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해 니체아 공의회 결정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 사상을 배격했다. 그러나 이교를 신봉해 배교자라 불리는 율리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아타나시오를 다시 귀양 보냈다.

 

이어 율리아누스 황제 사망후 로마제국은 요비아누스의 짧은 통치를 거쳐 동로마제국은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발렌스, 서로마제국은 니체아 정통교리를 지지하는 발렌시아누스가 통치하는 형세가 된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373년 아타나시오가 선종하자 정통교리의 옹호세력은 가파도키아의 삼총사 교부 즉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에 의해 계승됐다.

 

특히 바실리오는 발렌스 황제의 종교정책에 저항했을뿐 아니라 동생 그레고리오를 니싸, 막내동생 베드로는 세바스티아노, 친구 그레고리오를 나지안즈의 주교로 임명하는 등 형제와 친구들을 주교로 임명하여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관할교구를 강화했다.

 

반면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니체아 신앙을 줄곧 지지해왔고 발렌스 황제 사망후 발렌시우스 황제의 아들 그라시아누스가 전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그라시아누스는 다시 로마의 동부지역을 테오도시우스에게 맡겼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니체아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테오도시우스는 종교적 일치를 이루기 위해 니체아 정통신앙을 고집했다. 381년 하나의 신앙 안에서 제국을 일치시킨다는 칙령을 통해 니체아 신앙의 정통성을 공표했고 다른 어떤 이단도 금지시켰다.

 

제2차 보편공의회

 

테오도시우스의 종교정책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에서 다시 논쟁을 불러 일으키자 테오도시우스는 380년 11월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발탁했고 이어 381년 5월 그레고리오를 의장으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는 150여명의 동방교회 주교들만이 참석한 공의회로서 신아리우스주의, 성령배격론자, 마케도니아파 등 여러 이단들을 배격하고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니체아 신앙고백을 재확인하여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확정했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니체아 신경에 『또한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며 성부에게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받으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을 믿나이다』란 구절이 첨가됐다.

 

이 결의는 로마에 보고됐고 교황 다마소 1세는 서로마의 그라시아누스황제에 의해 소집된 로마교회회의에서 동방주교들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법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니체아 이후로 시작된 삼위일체의 논쟁이 일단락 됐다.

 

그러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성령에 관한 결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성령종속론 등을 단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동·서방교회의 신학을 선택해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좇아난다고 이해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난다고 해석했다. 이는 결국 서방교회에서 589년 톨레도 교회회의에서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자신들의 표현인 '성자에게서(Filioque)'를 삽입함으로써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서방에서는 신앙의 해석이라고 생각한 반면 동방에서는 신앙의 변조라고 여겼던 것이다.

 

「성자에게서」가 삽입된 이 신경은 서방교회에서는 점차 보편화 되어 마침내 1014년 베네딕도 8세 교황 때 로마에서도 채택돼 1054년 동·서방교회 대분열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만다.

 

지금은 음악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개최지 이레네 성당이 보여주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실천적이고 체험적이었던 신앙이 사변적 논쟁거리가 되어버렸다는 씁쓸함을 지울 길이 없었다면 너무 비관적인 것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