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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용미 시인 / 연두의 회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3.

조용미 시인 / 연두의 회유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한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하는 이 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월간 『현대시』 2018년 5월호 발표

 

 


 

 

조용미 시인 / 검은 연못

 

 

저 검은 거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고랭이 부들 골풀과 수향목을 비추고 있는 대낮의 어둠이다. 맑고 무서운 검은색이다.

 

연못가에서 멀찍이 서서 흑경에 비추인 물풀을 바라본다.

물풀이 정밀하게 새겨진 흑경의 표면을

 

검은 거울은 대리석처럼 누워있다.

 

거울 속의 어둠이 내장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파국을 예감하는 자의 두려움이 얼마나 깊은 연못을 만드는 것인지.

 

저 검은 거울의 싸늘한 고요함은

내게 어루만지듯 말해주고 싶어한다.

 

치자꽃 근처 짧은 잠은 아름답지도 쓸쓸하지도 않구나.

 

치자향 어른거리는 창 앞 물뿌리개의 물방울이 흩어질 때마다 치자꽃 봉오리가 목을 떨구는

어스레한 저녁이 자꾸 나타나고 사라지고

 

머뭇거리는 자는 흑경을 부수고 뛰어들 수 없으니

 

이제는 향기롭지도 어지럽지도 않은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연못을 떠나면 천문대의 어두운 밤하늘을 보러 갈 것이다.

어둠으로 어둠으로 밝은 어둠으로 가려한다. 이것이 오늘 하루 나의 어둠을 지키는 방법이니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2월호 발표

 

 


 

 

조용미 시인 / 어둠의 영역

 

 

여긴 아주 환한 어둠이다.

조금 다른 곳으로 가볼까.

 

천천히

휘익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처럼 나도 9년 6개월을 날아서 걸어서 그곳으로 갈 수 있다면 수차례의 동면 과정을 거쳐 자다 깨다 하며 어둠이라는 심연에 다다를 수 있다면

 

당신은 명왕성보다 멀어야 하지 조금 더 멀어야 하지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영역에 별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으면 곤란하다.

 

빈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어둠 속 저수지 근처 폐사지의 삼층석탑, 차창으로 얼핏 보았던 과일을 감싸고 있는 누런 종이들이 내뿜는 신비한 기운.

 

이런 것들에 왜 잔혹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몸서리쳐야 하는지. 슬픔이 왜 이토록 오래 나의 몸에 깃들어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것만 같다.

 

당신은 명왕성보다 멀어서 아름답고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없다.

 

당신과 내가 이 영역에 함께 있다.

 

계간 『문학들』 2016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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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曺容美) 시인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과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