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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연수 시인 / 실시간 단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4.

최연수 시인 / 실시간 단추

 

 

크기 다른 잠에 취향이 바뀌는 침대는

한 벌 정장 같다.

뒤척이는 벽과 바닥이 하품으로 여며진다.

 

악몽이 배앓이로 열리고

알람이 밤새 안녕을 풀어헤칠 때

남은 잠을 깔고 누운 반듯한 아침은 영영 풀리지 않는다.

 

기어가는 나이가 방긋 열리고

네 귀퉁이를 채운 나이는 봄바람이 풀려도

미간을 풀지 않는다.

 

열매들이 채운 계절이 붉어

눈시울 붉게 풀리는데

다독다독 채워도 삐걱거리는 어깨들

팔꿈치를 채운 탁자가 한쪽으로 풀린다.

단단히 여민 오해와 서운함을 주춤거린 몇 발짝은

한참을 더 지나야 풀어진다.

 

손발 묶인 침대가 풀린 윤달, 새로운 한 벌이 다시

여며지고

언제든 열 수 있는 손바닥이 안부를 쥐여준다.

 

실시간 풀어지는 헛소문에

진실은 한참 후에나 열린다.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4월호 발표

 

 


 

 

최연수 시인 / 구석들이 벗어난 구석

 

 

조마조마 돌아간 모퉁이가 햇살을 찰랑거리며 돌아온다.

 

설익은 길 하나 문득 끊기고, 몇 계절을 돌아온 안부는 굽이 높았다. 잦은 기침이 켜놓은 잔소리 속 다리 긴 원피스와 주근깨 벗은 도시는 어린 마음이 닿고 싶은 주소지였다.

 

중심이라고 믿은

웅크린 등을 벗어나고 싶은

비탈들

서성거리는 봄은 봄인 줄도 모른 채 편도를 돌아간다.

 

예전이라고 말하면 예전에 떠난 것이 되지

꿈은 꿈에 곧잘 기만을 당해

기어이 모퉁이들이 돌아오고,

 

망설임위에 얹는 처박힌 노선들

꺼냈다 집어넣기를 반복하는 여벌도 행선지가 같아

박제된 공기를 열고 나온 뻐꾸기 소리가 만료된 여행을 반복해 운다.

 

함부로 곡해하거나 변형하지 않는 광장이 돌아간

모서리는 또 다른 구석이다.

 

어둠이 방사형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가을은 비밀번호가 없어

맞물리지 않는 바람과 바람 사이,

몇 번의 추위와 더위가 블라인드처럼 열리고 닫힌다.

 

계간 『시현실』 2018년 여름호 발표

 

 


 

 

최연수 시인 / 목련의 오차

 

 

그해,

인구조사는 호흡이 가팔랐다.

 

매듭진 손이 가리킨 골목

오래거나 갓 핀 송이를 통계 낸 필체가 흐릿하고

가지는 여러 번 센 숫자를 담에 눌러 적었다.

 

가방을 챙겨 내려간 샛길이 비밀 같아서

숨은 꽃을 암산으로 헤아렸다.

발을 헛디딘 눈 먼 소식들 옆엔 괄호만 덩그러니 놓였다.

 

무료함만 켜놓고 일 나간 익숙한 이름을 들고 다시

골목 칸칸을 두드릴 때면

지붕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산 번지, 고요 한 채와 동거하는

찢어진 연과

붕붕거리는 꽃의 시종들.

 

눈부신 외출을 마친

인기척 없는 사월 옆에는 온기 잊은 한 켤레가 기록되고

마른 젖을 물린 어미개와 마주친 순간

녹슨 고리처럼 표정이 얽혔다 풀어졌다.

 

서류철엔 몇 마리 울음이 추가되었다.

 

계약직 같은 봄날의 낮과 밤이 다른 오차와 통계

수수료를 떼듯

하얀 방에 들어앉은 목련 촉이 팍, 끊어졌다.

 

학점과 맞바꾼 길에선

저걱 저걱 유리 밟는 소리가 났다.

 

 


 

 

최연수 시인 / 드므*

 

 

주술 통하는 곳이 얼굴이라면

신은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것들로 이목구비를 만들었다.

 

어떤 사무친 마음 있는지

물거울 속 또렷한 얼굴이 중얼거리고

내 손가락에 놀란 수피水皮가 재빨리 지문을 찍었다.

 

어느 궁에서 본 드므 속엔 당황한 불이 있었다.

슬며시 다가와 비추는 순간,

말끄러미 올려다봤다는 화마

떠다니는 달에 황급히 얼굴을 벗어 걸어도

푸시시 불은 꺼졌다고 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자신을 꺼버려야만 했을까.

놀란 걸음이 서둘러 빠져나가고

잠시 고요한 파문이 남았을 것이다.

 

불을 다스리는 건 냉수밖에 없지,

가슴을 끈 아버지에게선 여울목 물소리가 났다.

남은 화기가 있는지 약수 한 통 받아들고 오솔길을 내려가셨다.

 

냉장고를 열면

방금 다녀갔는지 흔들리다 잦아든 갈증.

유리컵으로 옮긴 찰랑이는 거울 속엔

여전히 화끈거리는 내가 있었다.

 

* 넓적하게 생긴 큰 독. 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을 간다는 주술적 의미.

 

 


 

 

최연수 시인 / 고양이캔디

 

 

하품을 뱉는 한낮에

누가 설탕을 뿌려놓았을까.

 

누운 그림자를 따라 정오마저 가지런해지면

노란 포도알이 가물가물 닫힌다.

수염에 찔린 비린 햇살이 나비모양으로 흩어진다.

 

네 다리를 늘어뜨린 나른한 호흡을

쪽쪽 빨아먹는 바닥

볕은 셀로판지처럼 바스락거리고

지붕에서 옥상으로 건너뛰던 아슬한 착지와

골목을 뒤지던 배고픔이 따스한 손에 다 녹는다.

 

오물오물

고양이를 아껴먹는 노파, 주름진 입 속으로

고요한 하품이 뛰어든다.

 

떠도는 울음을 불러 갈치 한 토막을 굽는 동안

발톱은 안으로 휘어졌다.

매끄러운 소리를 무릎담요로 덮고 앉으면

기류는 말랑하고 끈적끈적하다.

 

침침한 눈과 귀로 녹여먹는 달달함

쓰다듬을수록 동그래지는 뒷맛이다.

 

 


 

 

최연수 시인 / 프릴의 계절

 

 

음료를 삼키는

건조한 후두가 펌프질을 했다.

 

빨대 꽂힌 주스 팩이 홀쭉해졌다.

 

꽃들이 모두 뛰어내린 허전한 목

바람이 핥는 꽃대가 불안하다.

마지막 꽃냄새를 들이켜는 바람의 양 볼이 쏙 들어간다.

 

프릴은 허전한 목들이 살아가는 방식

꽃잎 무성한 계절,

꽃나무들이 몇 겹 주름 속으로 속내를 감춘다.

 

변종된 겹 백일홍이 숨긴 뒤편은 수상쩍고

목도리도마뱀의 프릴은 무기다.

 

지금은 시린 발을 감춘

늙은 연밥이 거꾸로 매달리는 계절

황혼은 거리의 불빛들을 숲으로 끌어오고

목이 허전한 나뭇가지들이 노을 목도리를 칭칭 감는다.

 

움츠린 외투 안주머니에 그의 봄날이 있듯

노란 부리를 감싼

숲속 프릴 속에는 숨겨둔 온기가 있다.

 

 


 

 

최연수 시인 / 우산의 시간

 

 

엄마를 따라간 그날, 공장에는 두개의 문이 있었다.

 

왼쪽을 열면 정오의 해가,

오른쪽을 열면 구름이 내걸리고

 

심장 쪽을 믿는 엄마가 우측 문을 열자

구름을 숨긴 포자들이 날아들었다.

섶다리 밀려온 수상한 기미가 함께 떠다녔다.

 

검은 하늘은 자주 무너졌다.

손잡이 망가진 우리 집,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만 웃었다.

 

꽃무늬 양산을 내던지고 우산공장으로 출근한 엄마

챙 좁은 우산 같은 월급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젖은 서로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슬레이트지붕에 대못이 박히는 시간

살이 부러진 여름은 길에 나뒹굴고

구멍 난 하늘이 방 안 양동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구름사촌이었던 우리는 퐁, 퐁, 리듬에 맞춰 잠이 들었다.

 

정오의 해를 찾아 나선 부도난 양산의 계절

먹구름 몰래 펼쳐든 우리들 웃음에서

녹슨 쇳소리가 났다.

 

2015년  《시산맥》 당선시

 

 


 

최연수 시인

2015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및 2015년  《시산맥》 당선. 평론집으로 『이 시인을 조명한다』가 있음.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장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