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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나' 라는 문장 ㅡ 지나간 이그조티시즘에 대하여
과거의 나는 우선 옥탑 거실에 부러 헌책방에서 구입한 때절은, 누런, 낡은 시집을 쌓고 스스로 붓칠을 한 기괴한 온갖 그림과 흑백사진 등을 넣은 액자들로 벽을 장식해.
지나간 테이프, 낡은 라디오를 축음기마냥 세워두고 긴 안테나를 고독한 전사의 검처럼 뽑아 펜촉과 잉크 따위를 전리품으로 가져다 놓았으니. 마시다 남은 양주병들로 나무 테이블 구석을 위로하고 한가운데 주홍빛 반조명이나 향초를 켜놓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앉아 시를 쓰고 그림을 연주한다. 혹은 기타로 음악을 그린다고, 1930년대 끽다점에 앉은 모더니즘처럼 허영과 허세가 들뜬 가짜 피로감의 예술가로 행세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는 네가 없었다.
- 그건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거지 그것은 어젯밤 서신에서 네가 한 말이었다.
- 시는 상처를 보여주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에겐 상처의 그 이면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것도 너의 말.
나는 내 지난 방의 혐오스런 포즈들을 사랑하였으나 그것으론 너를 조금도 사랑할 수 없어서
빈 위스키병과 빈 와인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한동안 기타의 여섯 줄 위에 내 손가락이 깃들지 않도록
대신하여 한 사람의 모르는 심신을 만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처럼 끝없이 밤을 흐른다면
- 당신이 신비하길 원하지 않을게. 당신을 더 알길. 더 파헤치고 깨부수고 싸우고 파괴하고 네 속살을 갈기갈기 찢기를. 우리는 우리가 피 흘리길 원해. 판이 튀는 엔리코 카루소의 레코드음악. 고장 났다. 작동하지 않고 끝없이 삐걱대서 그 까닭을 찾아내. 손목에 난 눈부신 별똥의 주검들. 잊지 마. 이것들의 이유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를.
이 말은 드디어 나의 문장.
나는 내 몸 위에 너의 서정적인 육체를 옮겨 적었다. 내 낡은 침대는 실로 오래도록 중독적인 병처럼 뒤척였고
너의 실재적 나체 이외에는 어떤 예술도 없다며 전향한 월북 작가처럼 춥디추운 혹한의 날씨를 나 외의 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완전히 녹여내 새롭게 창조하는 계절의 연필,
네 하얀 등, 그 뒤에 난 시간의 상처가 없었다면 그리고 나의 부족한 작은 흉터가 없었다면 써지지 못했을 하나의 시를 생각하며
그 해에 나는 비로소 나, 라는 사람의 문장을 사람들에게 발표하고.
계간 『시산맥』 2016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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