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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총알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6.

최금진 시인 / 총알

 

 

이것은 숨결의 끝부분

당신은 성에가 화산의 불구덩이에 끼는 순간을 경험한다.

사랑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우리를 통증 속에 나뒹굴게 할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논리가 가능하다면

아주 천천히 죽어가는 시간을 즐기는 것만이

뒤집힌 채 버둥대는 벌레들의 권리겠지.

 

지나간 것은 과거만이 아니다, 오지 않은 미래도 과녁 속에 갇힌 채

산산이 부서질 육체의 파편을 꿈꾼다.

그리고 통증은

타앙, 타앙, 떨어져나간 얼굴 위의 총성처럼 한참 후에나 당도할 것이다.

 

내가 너를 본다, 네가 나를 본다, 아주 짧은 찰나

아프지 않은 한 순간이 영원처럼 느리게 지나가는 것을 붙잡기 위해

우리는 더 빨리 서로의 몸에 날아가 박힐 것이다.

 

이것은 속도의 성기

있었다는 것의 흔적, 구멍, 죽음, 만개한 내장과 피범벅

네가 지금,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

 

월간 『현대시학』 2016년 2월호 발표

 

 


 

최금진  시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창비, 2007),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2014)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쳔년의시작, 2014)이 있음. 현재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