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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시인 / 리트머스 루메
루메는 그림자 속에 웅크린 선명한 암흑이었다. 꽃이 식물의 생식기관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루메는 그림자에서 나왔고 암흑은 점점 말라갔다. 항상 술 냄새 세 걸음 뒤에서 걷던 남자를 만나자 - 당신의 귓불은 죽음만큼이나 처져 있군요. 그 지독한 산성산성이 내 비늘을 왼쪽으로 돌아눕게 하죠. 나는 검어요, 루메는 검은 꽃이었다. 흔들리는 배꽃 그늘에서 허벅지 살을 뜯어 하나 둘 꽃잎 빠진 자리에 꽂아 꽃대궁 검붉게 채색하던 루메에게서 바람은 물기를 핥아갔다. 칠흑꽃 피었다.
청보리 머리채 휘잡고 흔들던 미친 바람이었다. 진주알 살짝 비치려 입 벌린 조개마냥 웅크린 잔등. 그 윗옷과 바지 사이로 섬광처럼 아낙의 속살 끄집어 낸 놈은, 흰 눈동자 번뜩이는 커다란 눈이 물결치는 청보리 사이에서 루메를 보려 보았다. 들판에 어둡진 곳으로만 흐르던 루메는 어쩌자고 흰 속살의 시선을 체적적분 해 알몸의 역사 한 덩어리를 보고 말았다 - 죽은 이의 몸은 김 먹구름 되어 보름달을 가려요. 등 기댈 하늘 아니라면서 오래오래 흘려가죠, 원래 아무 색도 가지지 못한 루메는 거스름 일어난 염기성 삶을 만나자 싯푸른 보리잔털의 실루엣이었다. 바람을 가두고 살 속을 파고들었다.
계간 『작가세계』 2005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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