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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수찬 시인 /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7.

권수찬 시인 /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책을 펼친 지는 오래되었다.

기록은 닳고 닳아 지루한 자막으로 새어나간다.

머릿속이 붉어진 오후,

구석에는 당신이 비스듬한 자세로 흘러내리려 한다.

그림자는 한 뼘씩 줄어들고

빈 고시원은 햇살에 부푼 빵처럼 지루하다.

 

치자 잎이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마른 향기

등 뒤에는 죽은 서가의 눈들이

햇발처럼 쏘아본다.

자신을 들키고 있다니,

당신은 그 페이지에서 영원히 멈출지도 모른다.

기록은 숨이 막혀

고시원 외벽과 비슷하다.

 

간신히 화장실 구석에 끼여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가.

가방에는 지로용지가 구겨져 있다.

금요일엔 일용직 근무를 서고

쪽창 밖을 바라보는 당신은

갈수록 욕실 안 거북이를 닮아간다.

건너야 할 문마다 단단하다.

책은 3페이지도 못 넘어가고

책 속의 깐깐한 주인을 언제 만날 셈인가.

 

당신은 이제 묻는다.

'삶도 없이 스스로 묶이다니'

고시원 옆문으로 빠져나가는 당신은

습성이 단단함보다 더 치열하다는 것을.

 

 


 

 

권수찬 시인 / 어머니의 입구

 

풀들이 허공으로 긁혀 있다. 자국 나지 않은 흙들이 갈라져 있고 안개가 먼저 마중 나와 있다. 어머니를 지층에 두고 오던 날부터 나의 계절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은 차가운 입구를 데우는 일이다. 동공이 마를 때까지 말라서 비어버린 어머니의 물집을 터뜨리러 가는 중이다.

 

사진 속에는 어머니가 아주까리처럼 심어져 있다. 네모난 목재 그늘은 어머니를 딱딱하게 받쳐주고 있다. 그날 이버지는 마루 창에 두터운 썬팅지를 붙였으며 포도나무는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난초 잎이 시든 저녁일수록 어머니의 관절은 다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계단을 무생물처럼 내려가던 아버지, 한동안 감감했다, 어머니의 위태위태한 박음질에서 터져나오는 통증은 절기를 맞은 듯 꺽꺽거렸다.

 

벽은 단단해도 악취를 풍긴다는 걸 회색구멍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람은 회색과 가까워지고 겨울의 속도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벽은 굽어질수록 폐허의 냄새로 흘러들어 어머니가 어깨를 기대어도 다정한 온기가 되지 않았다.

 

그해 포도나무는 어머니와 함께 싹을 틔우지 못했다.

 

 


 

 

권수찬 시인 / 새벽 강

 

 

날개를 더듬으며 죽은 새의 새벽 강은 길다.

이미 상처의 흔적은 바래졌으며

푸른 공기는 바닥으로 흩어진다.

 

저만치 자전거를 굴리고 가는 당신

간간히 스쳐 보내는 전봇대

길 위로 당신의 하얀 미소가 출렁인다.

원반 같은 하늘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옆구리에 아리송한 자루를 하나씩 매단 채

깊은 물속처럼 걷는다.

 

기억에도 없는 길을 더듬는다.

과녁을 좇아가던 그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

종이꽃 하나 접어 희미해진 행렬에 끼워 넣는다.

아련한 향기를 지우러 가는 중이다.

텅 빈, 저 문드러진 눈빛을 누가 다독여줄까.

 

서늘하게 죽은 바람 하나가

끝내 깊어지는 강변에는

서로의 안부가 몸부림친다.

희뿌연 지붕 위로 구름의 일가족이 지나가고

나는 시간의 표면에 흘러나오는

새벽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권수찬 시인 / 새를 깨우다

 

 

얼마나 많은 기류의 씨앗들이 이리 저리 흘러 다니며

성자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 했을까.

그 영혼들이 가여워

침묵은 긴 시간으로 흐르는 걸 거야.

새가 담장과 부딪히는 순간

누군가 한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소리 없는 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

허공은 바람이 표정이었다는 듯 구름도 빨라지지

작은 연못에는 잎의 말들이 둥둥 떠다니고

언젠가 내 안의 진입로에

그 하나의 빛과 하나의 어둠을 나눌 수 있는

나만의 동심원을 갖고 싶었지.

날개가 치솟는 정반대로의 방향인

낮은 파닥거림을 좇아

갈망은 거역할 수 없는 또 다른 부호였음을,

멀리 송전탑 아래로 안개가 밀려나오고

시원(始原)의 바람을 타고 기우는 새

숲은 은빛을 빛내기 위해 순결의 기호를 장식하지.

새들이 날개를 벗는 순간

깨어나기를 소망하지

해질녘 꽃들이 니얼니얼 춤출 때

갈잎은 물의 향기를 길어 올리지.

알 속에서 웅크리다 부화된 새

신성의 부리들은 부드러운 바람을 모으고

새로운 정념을 일으켜 세워

마지막으로 깊은 눈빛을 그려 넣지.

 

 


 

 

권수찬 시인 / 고등어 굽는 여자

 

 

밖은 서늘한 바다이다.

여자가 문을 나서자 물고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갈라진 음들이 물살로 퍼져나가는 시간

여자가 그물 옷에 묻은 저녁을 털어낸다.

 

지상 이층에 담긴 이력은

은빛 창 말라붙은 비린내가 전부이다.

부엌에서는 고등어가 팔딱거린다.

고등어의 눈은 굽어진 창을 바라본다.

여자가 비린내를 끼운다.

 

물 위로 흐르는 뉴스의 화보에는

바람의 흔적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바다 깊은 곳에

유난히 흔들리는 오늘 밤의 달을 그물질한다.

창의 화분마다 시퍼런 달빛을 심고

바다의 풍습을 달삭거린다.

여자가 엷은 입술로 주문을 외울 때마다

망원경에 씹힌 바다는 더욱 깊어진다.

 

여자의 푸념은 곧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때로는 팽팽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그물 자락 바다 한 가운데에 펼쳐 놓는다.

달빛에 고등어를 굽는 여자의 하루가 말라간다.

여자의 눈빛이 고등어 눈빛을 닮아간다.

 

2014년도 《문학의 오늘》 등단시

 

 


 

권수찬 시인

1965년 남원에서 출생. 2014년도 《문학의 오늘》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