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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향 시인 / 어머니 방
어머니 방에는 풍맞아 전신이 뒤틀린 오래된 장롱과 손으로 채널을 돌려야 지지직 소리를 내는 텔레비전과 무명실로 다리를 이은 돋보기안경이 그대로 놓여 있다, 아직도.
여기에 오기까지 나는 35번 국도를 지나 구절양장 죽령을 어질어질 달려왔다. 지쳤다고 피곤하다고 투정하기 전에 코에 익은 익숙한 흙냄새가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다.
밤마다 베개 밑을 들쑤셨던 회오리바람도 반갑게 창문 틈새로 고개를 갸웃, 내민다.
장롱 속에는 늘상 덮고 주무셨을 어머니의 이불이 아직 따스할 것이다. 나는 주술에 걸린 어린아이처럼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조숙향 시인 / 대숲 길
1
신새벽을 걷는다. 가느다란 대나무 이파리 위에 앉아 있는 맑은 이술 밤이 어두운 것은 투명한 우주를 바람에 씻긴 저 잎사귀 위에 올려놓기 위함이 아닌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밤길이 이슬 아래 대나무 잎사귀에 어린다.
2
두꺼비 한 마리 엉덩이를 뭉그적거리며 젖은 들풀을 헤치고 나타난다. 우둘두둘 내가 살아온 삶의 굴곡 같은 놈의 등허리에 여유가 흐른다. 나를 바라보는 놈의 시선은 이미 모든 시간의 비밀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대숲 길은 깊고 아늑하다.
조숙향 시인 / 쥐며느리
나는 한 마리 쥐며느리였네. 세상의 장판 밑에 숨어 살았네. 밤마다 마음의 자리를 뒤적거리며 마음에 잿빛 가로줄을 그었네.
나는 내 얼룩무늬만 안쓰러워하며 어둠과 습기만 갉아먹고 살았네. 오늘 장판 위로 기어올라 찬연한 햇살의 눈을 보았네. 산란하는 빛의 자유로움 나를 바라보는 따스함 내 생은 빛의 반대편에 있었네.
그 따스함에 두 눈이 먼다 하여도 이제 나는 장판 밑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걷기도 하였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몸을 안으로 말아올리는 작은 공벌레라네.
누군가 톡 건드리기만 하여도, 갑자기 머릿속이 둥근 백지로 변하는 쥐며느리라네.
2003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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