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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리 시인 / 바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30.

이승리 시인 / 바늘

 

 

찔리는 입장이 싫어요

혈관을 찾으며 눌러보는

간호사가

찌르는 입장도 무서워요

발등에도 꽂고

 

아기는 삭발하고

머리에도 꽂지

 

멍든 곳에서

멍든 곳으로

 

수직으로

수평으로

 

흡입하고

주입하고

 

계란도

뇌수도

 

혈액도

 

 

구강 가득 분사되는 약물은

 

안개의 바늘

바늘의 안개

 

수천수만 개의 바늘이

햇살처럼

 

 

계간 『문학에스프리』 2017년 가을호 발표

 

 


 

 

이승리 시인 / 껌

 

 

씹던 껌에 단물이 빠지자

껌이 목에 위협을 가한다.

착 달라붙으려 한다.

홀랑 넘어가지 않게 자칫 삼켜지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나는 열 살까지 함께 살았던 치와와

지순이를 향해 껌을 뱉었다.

냉큼 달려와 버려진 껌을 삼키던 지순이

그나마 사탕을 던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으나

지금 와 생각하면 그 정도 부술 이빨은 있었겠지.

 

멍청한 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지순이에게

형이라 불렀다, 암컷인 개더러

형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껌을 던져놓고 개집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눈에 물총을 쏘면 냅다

도망치는 지순이를 보는 재미로.

나는 내 소유가 아닌 여자에게 여자의 생명을

지우게 한 적이 있다.

 

줄에 묶여 이따금 풀어주면 아무런 복수의

짖음도 이빨도 드러내지 않는 지순이가

베란다를 훌쩍 뛰어넘었을 때

방으로 숨어 버렸다.

심장이 고무처럼 내 것이 아닌 듯하다가 트램펄린처럼 두근댔다.

한 해가 지나고 지순이가 죽은 후

베란다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살면서

그깟 축 늘어진 것에 탄성을 기대하며 맛이 어떨까

기어 나와 기어코 눈에 물총을 얻어맞는

내가

쪼그라든 채

빈다.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가을호 발표

 

 


 

 

이승리 시인 / 셀프 책 소독기 앞에서

ㅡ 여림 시집을 넣고

 

 

기침이 난다.

손때가 묻은 시집일수록

살아있는 책일 텐데

손때가 묻은 시집일수록

소독을 해야 하는 시대.

 

책을 날개처럼 펼치고

거치대에 꽂은 다음

살균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과거의 건강상태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독 바람을 못 이긴 채

나뒹굴고 만다.

 

쓰러진 시인을 주우며

셀프 책 소독기 앞에서

어떻게 나를 써내야

한권의 시집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손때가 묻어 소독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책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여림의 폐에 생기가 돈다.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가을호 발표

 

 


 

이승리 시인

2011년 《문학과 의식》에 시를 발표하며 활동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