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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용 시인 / 여행지의 의자들
겨울을 경청하고서야 나는 비상구도 아니고 어제 헤어진 당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바닥에 뭉쳐진 머리카락이 아님을 알겠다. 찢어진 살에서 쏟아지는 음화에도 끼어들곤 하던 열망이 젖은 바람으로 풀어진다. 단 한 줄의 비유도 없이 매 순간 파멸되지만 나는 유리가 아니고 어떤 전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의 집이나 욕망의 문턱은 더더욱 아니겠다.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기댈 곳을 찾을 때까지 이숙(異熟)의 눈물을 사용하겠다. 언 물속을 휘저을 때의 저릿함으로 아무도 떠나지 않은 산책길이라 쓰겠다. 물 밑에서 바라보는 당신은 안락사라거나 창가에 떨어진 깃털 혹은 자연스러운 물기를 상상한다. 높이에 대해서 그리고 용도에 대해서, 나는 패딩에 가득 배어 있던 빗물도 아니고 당신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계좌번호가 아니다. 값싼 양초 같은 그런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입 냄새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인지 오해할수록 더 생생해지는 창밖의 풍경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 것인지 고요가 잔존하는 굳은 물감의 화구에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 거듭 말하지만 나는 골목 끝에서 구부러지던 점집도 아니고 합종연횡도 아니다. 단지 당신의 마른 입술, 늘 어긋나는 곳에서 망치질 소리 텅텅 울리는, 누군가의 가슴에 박힌 기다란 못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계간 『미네르바』 2018년 여름호 발표
김관용 시인 / 환영(幻影)의 마을
한 달에 한 번,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염전이라는 안개를 찾아 나설 때 거기까지가 여름이었다. 백 년쯤 전에 깨뜨린 술잔에 손을 다친다. 자신의 피 맛을 아는 사람의 결구는 만년설 아래 묻혀 있을 작은 절간 같은 것이다. 사슴의 상상력으로 너를 초원이라 부르겠다. 우선은 그런 너를 위해 겨울로 드는 것이고 한 번씩 잠에서 깨듯 낮에도 잠에 빠져드는 걸 봄의 맥박이라 이해한다. 언제나 모든 너는 너의 부력으로 모든 나의 결락을 채워준다. 글썽일 때마다 사구(沙丘)는 자주 시력을 잃었고, 모래의 중음(中陰)을 물으며 원심력의 한계까지 간 우리는 한데 모여 웅덩이를 만들곤 했다. 곡두의 무늬가 차게 흔들렸다. 밤이면 숲을 연주하다 나온 아이의 발에 묻은 흙과 한순간 도취된 밤이 갈라놓은 세상의 이쪽저쪽을 사물의 목적이라 옮긴다. 낡은 질문의 문짝은 위태로웠지만 현자다웠다. 메모를 보니 글쎄, 여기까지가 미술관이었던 것. 나에 관해 폭로하자면 영원이란 문자에 긴장하고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 가장 두렵다. 얼지 않고도 추운 지방 이곳은 물질계에는 없는 행성이란다. 여기서도 더 멀어져야 내가 있을 테지만, 물론 그 사이 너를 발견하더라도 알은체는 힘들 것이다. 등에 달라붙어 웬만해선 떨어지지 않는 할아버지들. 그건 영원한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닐 테니까. 극장에서는 늦은 밤의 외투와 난청으로 죽을 수 있는 음악을 다짐한다. 이렇게 웃는 것이 나에겐 유서다.
계간 『미네르바』 2018년 여름호 발표
김관용 시인 / 달의 안목(眼目)
우주로 가는 푸른 선박의 귀소엔 내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는 음(音)이 떨고 있구나
어두운 허공의 저 매립지를 향해 지상의 색들이 열기구를 띄운다. 오래 보지 못할 거리를 떨어져 흘리는 눈물엔 황금빛 먼지가 쌓였다. 사실 월면(月面)은 지구의 눈알이었다. 세계가 만들어질 때부터 모든 구멍이 눈알인 것처럼, 오늘 밤은 유리벽 안 철물처럼 와서 돛을 올린 목선으로 떠날 것이다. 농염한 구멍의 저쪽에서 화택(火宅)의 음모를 꾸민다. 맹목은 부촌을 배회하는 개의 주린 위(胃)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것, 지옥이 민낯을 드러내는 데에도 동과 서는 인연이 달랐다. 가까스로 빛을 본 철로 위로 또 한 사내가 뛰어들었다. 맨몸으로 안고 있을 때 살이 닿지 않는 빈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지는가. 밤길의 주유소와 트럭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입이 마르다. 플루트를 떠올리면 지구는 마개다. 그리고 또 일식의 좁은 관을 빠져나온 소리들이 갑충으로 변한다. 잎이 넓은 식물과 찬 모래의 식감으로 검게 윤색되는 몇 악절이 물동이에서 철렁거렸다. 사랑이라 말하기엔 너무 정직한 거리였고 질병이라 변명하기엔 너무 밝은 표정 탓이다. 들것에 실려 가듯 먼 우주에서 반쯤 눈을 감은 채 지구를 바라보면 서글픈 사람들이 선택한 음악은 줄곧 견디는 것이었다. 주워 온 구두에 키우는 접란의 심정으로 골방에 든다.
잠든 아들의 눈을 쓰다듬듯 사막 한가운데 낙타의 머리뼈를 바람이 핥고 있다. 그것을 달이라 생각하면서
계간 『미네르바』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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