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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희 시인 / 지우개부심
태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자라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한평생 한 개의 표정으로 일관하는 공산품이 될 수 있었다 사소한 뼈 하나 녹슬지 않은 채 서랍 속을 뒹굴 수 있었다 이 동네, 저 동네, 무심하게 늘어진 전선이 될 수도 있었다 덕지덕지 광고를 붙인 전봇대가 될 수도 있었다 속이 텅 빈 건전지나, 양팔을 잃은 의자 거리낌 없이 낭비되면서 끝끝내 소용없어지는 무엇 이를테면,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곡식을 잔뜩 채운 입이 아닌 다른 모든 것 사망자 심심찮게 출몰하는 저녁뉴스에 맥주 한 잔 곁들이며 감쪽같은 사지 속에 속절없이 갇힌 채 좋아라 사는 걸 보면 사랑이며 행복 같은 이 세계의 사탕발림이 또 없다 아무 보람 없이도 지우개는 잘만 닳지 않는가 나도 지우개가 될 수 있었다 손모가지가 둥글둥글 유순하게 닳아갈 수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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