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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경묵 시인 / 질경이의 꿈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5.

임경묵 시인 / 질경이의 꿈

 

 

질경이도 꽃을 피우느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능선길에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풀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복주머니란도 달랑달랑 자줏빛 염낭을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거든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당신의 능선길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고 있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어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 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째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당신의 땀방울을 말리기엔 키가 너무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이나 깨진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에 입맞춤할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젠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

 

2006년도 제8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임경묵 시인 / 버럭론(論)

 

 

  봄볕이 며칠째 몽우리를 만지작거리니까

  목련이 제 가슴을 확 보여 주었다

  애기똥풀도 놀라서 길섶에 꽃을 토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가 힘들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딱 한 번 버럭 하셨는데

  조촐한 세간들이 좁은 마당을 함부로 날아다녔다

  그 후로 공부가 힘들지 않았다

 

  오래 참았다가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은 아름답다

  상수리나무가 빛나는 열매를 내려줄 때는

  갈바람이 나무의 뺨을 갑자기 후려칠 때다

  그래야 단풍도 붉으락푸르락한다

 

2007년『수주문학』 제4호 2007년 발표

 

 


 

 

임경묵 시인 / 우산 수리 전문가

 

 

  등굣길에 비가 온다는

  우산 수리 전문가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가 우산을 건네자

  끝말잇기를 하듯 빗방울이 떨어진다

 

  엊그제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등굣길을 나섰던 우산 한 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거하고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우산의 팔구십 퍼센트가 나를 위해 쓰였다

 

  한 번은 다 저녁에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는데

  당황한 우산 수리 전문가가

  빗속을 뚫고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불쑥 우산을 건넸다

 

  비 맞고 다니지 말아라

 

  돌이켜보니,

  배후에 우산 수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우산 수리 전문가가 툇마루에 앉아

  구름의 방향과 색깔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새로 수리할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린다

  작년보다 잔 고장이 더 많아진 그가 우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올 확률은

  팔구십 퍼센트.

 

계간 『시산맥』 2017년 여름호 발표

 

 


 

 

임경묵 시인 / 제노비스 신드롬*

 

 

  비닐봉지가 툭 터지자

  붉은 방울토마토가 한꺼번에 쏟아져

  지하 계단으로 굴러갑니다

 

  엄마,

  나도 추락하고 싶은데

  우린 왜 맨날 반지하에 살아요

 

  너도 낯가림이 심하구나

 

  누군가 발로 뻥 찬

  최저생계비처럼 찌그러진 콜라 캔 하나가

  사납게 짖으며

  지하 계단으로 달려옵니다

 

* 방관자 효과

 

월간 『현대시학』 2016년 8월호 발표

 

 


 

 

임경묵 시인 / 얼음 소녀

 

 

잉카의 조상이 그늘처럼 떠다니는 설산(雪山)에서 나는 날마다 조금씩 야위기로 했어요 더는 붙들 곳이 없다며 가슴을 더듬던 추위가 초경의 연한 꽃망울까지 얼어붙게 했죠 봉인된 돌무더기 안에서 오도독오도독 고드름 깨물며 숨바꼭질을 할래요 달빛에 얼어붙은 어둠은 언제나 나를 숨겨 주죠 콘도르 깃털 뼈로 만든 피리 소리가 들리나요 눈먼 바람이 배냇짓 하는 꽃씨를 업고 산정(山頂)에 오를 시간이에요 쉿, 큰 구름이 조막 구름을 뼈째 삼키고 은빛 눈꽃을 토하고 있어요 이곳에선 눈 내리고 그치는 일이 부질없다며 광대뼈를 드러내고 울음을 쏟아내는 눈사태 氏, 얼음 창문에 달라붙은 서리꽃 좀 치워줄래요 어깨를 늘어뜨린 어색한 포즈로 미끈하고 아릿한 맛의 꽃씨를 찾아야 겠어요 눈덩이 하나에 꽃씨 한 톨씩 꼭꼭 눌러 심고 저 팽팽한 빙하로 힘껏 던지면 만년설의 발성법을 익힌 빙하가 어쩔 줄 몰라 쿨룩대겠죠 박물관 한편에 서서 나를 읽고 있는 당신은 혹시 내가 던진 빛나는 꽃씨 중 하나인가요? 올해도 팜파스엔 옥수수가 풍년인가요?

 

* 아르헨티나 북서부 칠레 국경 지대 해발 6,700m 지역에서 발견된 소녀 미라.

 

 


 

 

임경묵 시인 / 해금(奚琴)을 읽다

 

 

  거추장스럽구나 발모가지 위의 것들

  댕강 자르고

  뿌랭이만 남은 오반죽(烏斑竹)

 

  꽝꽝한 적막을 구부려

  슬근슬근 목울대 당기는가

  뿌연 어둠을 켜자

  뜨거운 꽃잎이 허공에 흩날리네

 

  숲에서 다람쥐눈물버섯을 찾다가

  길 잃은 고라니 한 마리

  고부라진 외길에 서서

  헛헛한 종아리로 달빛을 헤집네

  고라니 꼬랑지는 자꾸 안개를 뿌리쳐

  산벚은 허리춤에서 꽃잎을 놓아주었네

 

  외길은 길어지다가 한껏 멀어지고

  봉분처럼 어두운 달의 뒤편엔

  고불고불 아흔아홉 길도 들어 있다고

  대숲에 기댄 늙은 안개가

  마을로 내려가는 외길을 다독이는 밤

  허공을 베어 먹은 활의 허리엔

  지금쯤 설화가 무르익었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 등단시

 

 


 

임경묵 시인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2006년도 제8회 수주문학상 수상. 2011년 대산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