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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윤학 시인 / 대파 술잔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5.

이윤학 시인 / 대파 술잔

 

 

수천 년 전 대파 꽃봉오리들이 포석정 술잔처럼 떠서 돌아오고 막다른 구멍으로 도주하는 쥐새끼가 바로 뒤를 돌아보는 착각에 빠졌다 단박에 고통을 제어할 기억생성장치가 고장 난 우리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작살은 쥐어지지 않았다 어묵공장 기숙사를 기어 나온 삐뚤이소라의 귀지 같은 낮달이 당신의 눈동자 동공 우물 뚜껑을 밀었다 송사리 배때기 허옇게 떠오른 실개천 폐수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부양한 썩는 돼지 피 냄새를 맡고 입으로 숨 쉬는 연습을 하였다 우리의 그러쥔 주먹은 펴지지가 않았다 채점하지 않은 로또번호와 태어나지 않을 다음 생의 성별을 맞추는 짤짤이 동전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한나절 태양이 대파 꽃밭을 스캔하는 동안 우리는 방광처럼 숨이 막혔고 지나간 얘기를 반복해 지껄였다 때로는 서로의 이름이 생각 안 나 이상형 이름으로 지어 불렀다 우리의 머리가 지나치게 자란 혹이라는 의견에 박수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저 죽으면 생매장을 해줘요 다시 불속에서 꺼내는 수고를 덜어주고 싶어요 한쪽 눈을 감고 우리를 보고 피해간 사람들을 위해 방울소리가 날 때까지 찢어진 대파 술잔을 기울여요 어떻게 살까를 궁리할 때는 몰랐어요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은 저녁이 오고 있었다

 

『동국문학』 제45집 2018년 출간

 

 


 

 

곁눈질로 대파의 꼿꼿함과 대파 꽃의 당당함과 억센 줄기를 보아왔다. 대파의 매운 냄새를 매운 맛으로 변환시키는 재주는 눈물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내가 하는 생각과 상상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마저 들켜버리면 나는 죽은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착각에 빠졌다

 

최소한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여겼다.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산 나는 주눅이 들어 혼자 있을 때에도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도 누군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뜀박질을 하였다. 편한 상대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반벙어리란 걸 더 이상 들키고 싶지 않아 사람들을 피해 쏘다녔다. 그로부터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코로 쉬는 숨이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곁눈질로 대파의 꼿꼿함과 대파 꽃의 당당함과 억센 줄기를 보아왔다. 대파의 매운 냄새를 매운 맛으로 변환시키는 재주는 눈물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내가 하는 생각과 상상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마저 들켜버리면 나는 죽은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착각에 빠졌다. 죽은 지렁이는 바닥에 있었고 개미들이 끌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생각과 상상을 염탐하기 위해 말을 붙이려는 거였고 멀정하게 꿍꿍이속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천변의 길쭉길쭉한 대파 밭 꽃들은 지나치는 기차들의 엄살을 간파한지 오래였다. 흰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녔고 경보를 하는 사람들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기시감에 사로잡혀 대파 밭을 비틀비틀 걸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소주 한 병 사오라 부탁하고 싶었지만 내 혼잣말은 속에서 들끓는 것이었다. 대파 밭이랑을 이어붙인 곳에는 삼십 몇 년 전에 문을 닫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눈을 감고 걸어갔다. 새로 돋은 포플러 이파리들이 손을 까불렀다. 노깡 우물물을 퍼 빨래를 헹구는 젊은 어머니는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그림자를 숨기고 휘어진 길을 걸었다. 구멍가게 앞 평상에는 죽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선학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뒷문을 통해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선학소주 됫병을 쌕의 주둥이를 넓혀 숨겼다. 구멍가게를 나오려는데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 이름에 오빠를 붙여 불렀다.

 

나는 일 년 후배인 그녀와 대파 밭을 걷고 있었다. 대파 대를 둘 꺾어 들고 팔각정으로 가 미지근한 선학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오래 전에 이혼을 해서 아이 둘을 혼자 키웠고 얼마 전에는 동네에서 근무하던 군인에게 떠밀어 시집보낸 어머니마저 떠나보냈다고 했다. 삼십 몇 년 전에도 길쭉한 목울대 대파 술잔이 버려졌다. 그녀가 시집 간 줄도 모르고 이혼한 줄도 모르고 혼자 사는 줄도 모르고 목울대 대파 술잔은 끈적거리기만 했었다.

 

 


 

이윤학 시인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글쓰기를 시작. 시집 『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그림자를 마신다』,『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나를 울렸다』,『짙은 백야』와 장편동화『왕따』,『샘 괴롭히기 프로젝트』,『나 엄마 딸 맞아?』, 산문집『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등을 펴냄.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