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은진 시인 / 질식
너는 낯선 냄새를 풍기며 한 번도 본 적 없던 자세로 나를 기다려
말해봐, 그 순간에 대해
문을 닫고 돌아선 너에게서 바람이 일고 푸른 잉크가 물에 풀어지듯 슬픔은 이상한 평화와 기묘하게 섞여 든다
얼어붙은 발자국을 향해 굶주린 모기떼처럼 달겨들던 이상한 글자들 해석할 수 없이 흐트러졌던 풀잎들의 방향
말해봐, 제발, 그 순간에 대해
소리가 소멸해버린 완전무결의 암흑이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던 기도들의 모욕 잊을만큼 황홀한지 혹은 아픈지
너는 나를 이끌고 어떤 시간과 공간 위를 활공해 저기 우리가 있던 숲을 봐, 너는 말하지
사소한 호수와 사소한 둥지와 사소한 감정들 멀리서 보면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아서 멀고 낯설어서 네가 좋았어
하지만, 너는 죽었잖아
밤의 깨어진 틈으로 스며나오는 푸르스름한 연무처럼 뿌옇고 투명한 너의 몸을 관통하며 나는 폭신한 잠옷을 입고 마지막인 듯 깊이 심호흡을 한 다음 너와 소리 없는 말들을 교환한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너.
월간 『현대시』 2018년 1월호 발표
강은진 시인 / 하모노그래프
나는 내가 낯설어 누가 부르면 두 귀를 잡아당겨 입을 가리고 배교자처럼 도망치고 싶었다
혼자 깨어있는 밤 죽은자들의 노래를 볼 수 있다면 좋겠어 세상에 없는 도형을 그리며 공명하는 노래
나를 부르는 그들의 소리는 끝없는 심연으로 끌려 가는 나선의 소용돌이
도착할 수 없는 곳으로 질주하는 슬픔들 서로의 목젖을 맹렬히 물어뜯는 사람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연두빛 풋콩의 비릿한 냄새가 불었고 나는 말라붙은 콩껍질처럼 잠들곤 했다
누가 보낸 화음이었을까 내 목에 흉터처럼 새겨진 완벽한 대칭의 파란 꽃은
그때 갑자기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버렸다 그리고 배교자처럼 도망쳤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이 기묘한 노래를 멈춘 적이 없어
달이 너무 빨리 뜬 걸까 누군가 끝내 나를 기억하는 밤
계간 『서정시학』 2018년 봄호 발표
강은진 시인 / 오드 아이드 캣(odd eyed cat)
내 왼쪽 눈은 이제 빛나지 않아 있잖아, 토토, 그건 말야, 내 눈이 너무 많은 빛을 흡수한다는 거야
진공의 깨진 틈으로 공기가 무섭게 쏟아져들 듯 나선을 그리며 빨려 들어가는 시간들의 중심에 죽은 자의 말들이 광속으로 들이닥친다
이상하지, 토토, 반짝인다는 건 힘껏 버틴다는 거야 그 많은 빛들이 내 눈 속으로 쏟아지고 들어와서는 사라져 마치 목 매 죽은 사람의 풀려버린 괄약근처럼
너는 밤에 노래하고 나는 낮에 왼쪽 눈을 감아 윙크하는 상처의 매혹
눈을 뜨면 조금 어둡고 눈을 감아도 조금 어두워 거기 있지? 토토?
내가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네가 말할 때 혈관을 따라 돋아나 일제히 도열하는 돌기들
어떤 감각 내부에 슬픔과 두려움의 중간쯤인 감정이 있어 굳어버린 흉터에서 너를 향해 길다란 촉수가 자라난다
투명한 토토, 나의 밤, 나의 목소리, 해가 지고 종려나무 잎이 동그랗게 말라가면 한여름 체리처럼 붉은 외투를 입고 중간쯤에서 만나
네가 부르는 소리 없는 노래를 따라 나는 눈을 감고 있는 힘껏 진공이 될거야
월간 『현대시』 2017년 10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정권 시인 / 黑板 (0) | 2019.09.26 |
|---|---|
| 권순해 시인 / 오후 두 시의 꽃무늬원피스 외 2편 (0) | 2019.09.26 |
| 안미옥 시인 / 적재량 (0) | 2019.09.26 |
| 최호일 시인 / 의자 이야기 외 2편 (0) | 2019.09.26 |
| 최금진 시인 / 총알 (0) | 2019.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