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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겨리 시인 / 달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6.

김겨리 시인 / 달인

 

 

  마수걸이가 떨이가 되어야 파장이 오고

  바코드도 없이 눈대중이 정가표인 푸성귀들처럼 그녀,

  이젠 보도블록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듯

  삶의 좌표도 없이 평생 한 평의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다

  해마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걷어 내고 다시 깔 때에도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그녀의 자리는 늘 공복으로 남겨진다

 

  길모퉁이 자투리의 밑그림이 된 그녀,

  그림자와 그늘에도 엄연한 차이가 있듯

  노숙과 노상을 수렴하는 오랜 좌판 행상

  견딘다는 말과 버틴다는 말의 경계를 지운다

  골목의 자전과 공전의 좌표가 된 지 어언 삼십여 년

 

  수령으로 치면 600년쯤 된 보호수가 되었을 텐데

  커버가 깨진 좌회전 깜빡이등처럼 가끔씩 비상등도 켜지지 않고

  바싹 마른 나무 그림자가 되어 실바람에도 쉽게 흩어진다

  조각보에 엎질러진 햇살이 묵은지 국물처럼 얼룩져 있다

 

  바람에 베인 구름의 투명한 상처가 나뭇잎 끝 물방울로 맺히면

  그녀의 얼굴에 핀 검버섯도 지고

  덤으로 얹어 주던 노을도 잔고로 쌓인다

  나무의 미간 사이에서 돋는 달이 현판인 자정 무렵

  불을 끄는 걸 깜박 잊은 채 잠든 그녀의 꿈은 영영 꺼지고

 

  아침, 담벼락에 피어 있는 봉숭화 몇 송이 눈이 퉁퉁 불어 있다

  척 하면 삼천리인 가로수도 오늘은 통밥이 맞지 않는 듯

  틀린 점괘를 자꾸 들여다본다

  골목의 초입에 뿌리를 내린 나무의 후생이

  결대로 편집되던 나무의 퇴고를 이제야 마친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2월호 발표

 

 


 

김겨리 시인

1962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2015년 《농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분홍잠』(시산맥, 2016)이 있음. 2017년 제8회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