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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해 시인 / 오후 두 시의 꽃무늬원피스
치킨 양념이 끈적한 그녀를 바닥이 보일 때까지 어린 고양이가 핥고 있다 그녀를 들락거린 지문이 두꺼워질수록 꽃은 멀어지고 무늬만 남는다
한때 그녀도 일요일 오후의 벚꽃 닮은 아이스크림 앞에서 달콤하게 출렁이던 적이 있었다 치유되지 않은 계절과 계절의 그늘에 가려 더 이상 꽃을 피울 수 없는 그녀 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말을 더듬어 간다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강바닥처럼 오후 두 시의 빛이 마지막 그녀를 읽고 있다
손수레 하나 부서진 질그릇 같은 그녀를 싣고 재활용 의류수거함에서 떠나고 있다
권순해 시인 / 유목의 길
초원으로 향하던 검은말 한 마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한 떼의 발굽 소리는 잦아들고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는 유목민들의 행렬 나도 검은말 잔등 위에서 내 길을 들여다보고 있다 초원은 눈앞인데 유목은 너무 멀다
누군가의 울음이 조등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지만 귀가 잘린 말들은 듣지 못한다
새로운 길은 수많은 발굽들이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것 그때 기우뚱 길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보는 자가 유목민이다
나는 말갈기를 흔드는 바람의 속도를 잰다 초원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깊고 어두운 나이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열리는 유목의 길
잘린 귀들이 새싹처럼 다시 돋아나고 검은말이 머리를 숙이고 풀을 뜯는 자리 나는 살아온 만큼의 풍경을 오래 읽는다
권순해 시인 / 갯벌장화
뒤축이 안으로 접힌 그녀가 빨랫줄에 매달려 있다 뻘에 기대어 간신히 발가락만 허락한 축축한 시간을 볕에 말린다
바람이 수평으로 불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들리는 촘촘한 생의 음계가 마치 곡예를 하듯 빨랫줄에 감겼다 풀어지고 감겼다 풀어진다
휜 발을 감싸느라 한 번도 온전할 수 없었던 쭈글쭈글한 이력
짭짤하게 간이 밴 그녀를 갈매기가 콕콕 쪼고 있다 질척하게 접혀 있던 한생이 새의 부리 끝에서 다시 팽팽하게 태어난다
2017년 《포엠포엠》으로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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