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기성 시인 / 줄넘기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2.

이기성 시인 / 줄넘기

 

 

  아빠여, 우리의 세계는 흐릿합니다

  오늘부터 줄넘기의 규칙이 없어지고

  공중에 떠오른 스무 개의 발과 스무 개의 발이 동시에 착지를

  붉은 등과 파란 등이 동시에 켜지고

  아빠의 귀가 점점 커집니다 목도 길게 늘어나지요

  아빠의 커다란 배, 그것은 희고 출렁이는

  이상한 감정을 유발하지만

  120킬로를 훌쩍 넘은 몸이 공중에 떠 있을 때,

  떨어지는 햇빛에 걸려 꿈틀거리는 아빠여

  가족들이 소풍 떠나는 일요일에도

  아빠의 발은 조금 더 자라고 기다란 귀가 더 커지고

  김빠진 맥주처럼 감각 없는 발이 걸어가는구나

  아빠는 닭발을 먹지 않는구나

  그러나 공원에는 잿빛 비둘기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아빠는

  하나, 둘, 셋 고독한 줄넘기를 배우고

  구슬피 울면서 펄쩍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다정한 가족들이 예의 바르게

  흰 손수건을 잔디밭에 펼쳐놓고

  규칙적으로 점심을 먹을 때

  이런, 떨어지는 줄에 발이 걸려

  가족들은 갑자기 아빠를 발견하고

  얘야, 너는 가족을 잃었구나

  줄넘기를 잘 하는 미아가 되었구나 그리고

  아이의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줄넘기의 규칙과 질서가 오늘은 열차처럼 사라지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복수 따위를 꿈꾸지 않는 오후에

  햇빛이 두 눈을 찌르고 또 찔러서

  아빠여 우리의 세계는 흐릿합니다

  아직 푸른 안개에 젖은 듯

  너무 먹구름에 젖은 듯

  거대한 줄에 걸린 발목이 차가워집니다, 아빠여

 

시집 『타일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0) 중에서

 

 


 

이기성 시인

1966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을 졸업. 1998년 《문학과사회》에 〈지하도 입구에서〉등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불쑥 내민 손』(문학과지성사, 2004)과 『타일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0) 그리고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소명출판, 2009) 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