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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시인 / 오래된 사랑
반달이 골목 끝을 가로막던 밤이었다 그가 줄장미 번져 오른 담벼락으로 갑자기 나를 밀어부쳤다 블록담의 까슬함이 등을 파고들던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첫 키스의 기억, 사랑이란 그렇게 모래 알갱이 같은 까슬한 감각을 몸속에 지니는 것 줄장미가 벙글어 붉은 꽃을 피울 때마다 내 사랑은 모래알에서 자갈돌이 되었고 억센 바위가 되어 물길을 막았다
가슴 그득 물이 차올랐을 때 나는 정을 박아 바위를 쳐내렸다 돌부스러기들이 텅텅 튕겨나가고 발등에 얼룩지는 피멍,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날궂이로 상처가 덧나곤 했다
바람이 헛되이 모래를 쌓는다 엎드린 채 가시울 키우던 등 위로 검은 피가 강처럼 흐르고 마음 속 어디선가 해머 소리 울리며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위, 구르며 부서지며 물길을 낸다 비로소 깊어지며 흩어지는 모래 알갱이들,
계간 『시안』 2003년 가을호 등단시
박수현 시인 / 타임래그2*
오월의 봄꽃들이 다 진 뒤 서울을 떠났는데 그곳엔 환각처럼 사월의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암자주빛 수수꽃다리가 숭어리째 흔들리자 한 무리 구름떼가 간지러운 듯 더 크고 환한 민들레며 해당화 할미꽃까지 까르르 뱉어내는 들녘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도 봄이라고 말해주지 않던 첫 번째 봄을 떠올렸다 조용히 왔다가 혼자 져버린 봄을,
이곳은 저녁 7시 서울은 오전 11시 다른 두 개의 숫자판이 있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지만 생각은 자꾸 한 방향으로 감긴다 너무 멀리 떠나와 그대를 사랑했던 명백한 사실도 희미해지는 이 저녁 산책길 막다른 골목길에서는 늘 검은 새떼를 만난다 날개를 펼치면 비로소 죽지의 진홍 무늬가 드러나는 새 깃털을 세우고 온몸을 떨며 꽁지를 들썩이며 운다 도륵독독 도르륵 독독 붉은 마음을 건너 늪을 휘돌며 운다 늪가 부들이 소스라치며 날을 세운다 수면에는 파문이 첫 키스의 떨림처럼 번지고 그 무늬는 다시 새의 울음으로 기록되어 그대의 꽃대를 흔든다 나비핀을 머리에 꽂은 첫 번째 것들의 노래가 리플레이 리플레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초록 밀밭 사이로 사랑하기엔 너무 늦은 두 번째 봄이 발꿈치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구름을 베고 누운 어떤 연인들은 검은 날개를 일제히 접는 저녁 늪가에서 흩어진 새의 울음을 모우기도 하리라
*타임래그: 장거리 여행 후 시차로 인한 현기증(vertigo), 불면, 불안정감 등의 제 현상
계간 『문학마당』 2010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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